고래 싸움과 새우 등

나는 고래일까 새우일까

by내민해
이 말을 듣고서야, 봄은 자신이 왜 가을을 계속 만난 건지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가을에겐 일등이 되겠다는 조급함이 보이지 않았다. 제일 앞서나가는 사람들의 부류에 끼려는 마음도 없어 보였다. 낄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달뜬 마음으로 언제든 앞으로 치고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 중요했다. 욕심내다 낙오하게 될까 봐는 아니었다. 봄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봄은 세상의 변화를 기민하게 주시하며 좋은 기회가 포착되길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잘나지 못한 사람의 열등감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봄은 앞자리를 힐끔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것에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가을도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윗집 부부> 황보름



회사 사무실 속 내 바카라상은 꽤나 단출한 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집이나 방이 아닌데도 사무실 바카라상조차 아기자기하게 잘 꾸미고 가꾸는 동료들이 있는데 나는 반대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들여놓는 것도, 늘어놓는 것도 싫어하는 성향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지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시야에 많은 물건이 잡히는 것 자체가 어지러웠을 뿐이다. 사람이 많은 공간을 싫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오감이 다 민감한 편이라 다다익선이 아닌 소소익선을 외치고 싶은 심정. 출퇴근 시간도 사람이 많은 시간을 유독 피하는 이유가 다 이 때문이다. 출근과 동시에 그대로 발을 돌려 퇴근하면 안 되니까?


올려둔 물건이 많지 않은 바카라상에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면 펜꽂이가 아닐까 싶다. 펜꽂이 자체가 독특하다는 건 아니고(그냥 흰 컵이다) 다름 아닌 문구 때문이다. 이 컵은 몇 년 전, 프리랜서로 일하시는 한 작가님에게 선물로 받았던 건데, 컵보다 문구가 마음에 들어 펜꽂이로 쓰기 시작했다. 문구는 다음과 같다.


"혼자 일해요"


끝. 저 문장이 다다. 거기다 명조체. 기본을 중요시 여기는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회사 바카라상에 저 문장이 든 컵을 보란 듯이 놓아둔다는 건 꽤나 도발적이다. 다 같이 일하는 공간에서 당당히 혼자 일한다고 말하다니. 덕분에 동료들이 내 자리를 지날 때마다 종종 소리 내어 읊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다. 뚝심 있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마다 웃음으로 화답했다(어쩌라고). 10년 넘게 슬롯생활을 하면서 품고 다니는 문장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온라인 게임에 친구 사귀러 오는 거 아니다'였다. 그래, 온라인 게임이 무슨 놀이터도 아니고, 삼삼오오모여 영양가 없는 이야기(흔히 뒷담화라고 하는)를 떠들어대는 동료들 무리에 끼는 건 정말이지 질색팔색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내 일을 하고 싶었다. 점심 식사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는 것도 이제는 정말 이골이 날 지경이라, 개인적인 메시지가 올 때마다 동일한 거절 문구를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나도 참 징하다). 그래서 컵에 있는 문장에 이 문장을 하나 덧대고 싶을 때도 많았다.

"혼자 놀아요"

그동안 혼자 일하고, 혼자 노는 건 직바카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만 꼼꼼하게 잘 하면 됐으니까. 팀원들 자체도 원체 조용한 사람들이라, 우리 층에 찾아온 다른 팀 직원들은 이곳은 꼭 독서실 같다며 덩달아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곤 했다.


직바카라 제안을 받았던 게 사실 이번만은 아니었다. 몇 차례 있었지만 계속 거절해왔다. 조직 특성상 거절이 가능한 구조였고, 전면에 나서는 걸 꺼려하는 내 성정상 그게 맞다 여겼다. 하지만 올해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고 말았다. 욕심을 부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울며 겨자먹기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중간 관리자가 된다는 건 역시나 내 옷 같지 않았다. 내 일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자꾸만 억울한 일이 생겼다. 위에서 아래에서 치이는 일들이 잦아졌다. 그러다보니 하나둘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묵묵히 내 업무만 담당할 때는 몰랐던 조직의 일들이 수면 아래에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유명인들의 삶에 감히 빗댈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과 마주치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이런저런 일들에 자꾸만 휘말렸다. 나의 존재조차 몰랐던 이들에게 나의 이름이 여러 번 거론되기도 했다. 왜곡된 말들은 애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와전돼 번져가기 일쑤였고, 일일이 바로잡거나 해명할 수도 없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그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같은 말들은 자꾸만 힘을 잃었다. 아니, 바로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저 수군대는 소리에, 들려오는 비난에 조용히 말을 삼키는 순간들이 늘어갔다. 해명하려 들수록, 부정하려 들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오독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나를 자주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대면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입으로 말을 하는 행위 자체에 피로함을 느끼는 나였으니(오죽하면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하루 종일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애초에 지는 싸움이었다. 싸울 의지조차 없는 나를 향한 누군가의 맹목적인 적의가 곳곳에 퍼져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한 가지 일만 해왔다. 업종이 달라진 적은 있어도 직무가 달라졌던 적은 없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상사를 거쳤고, 그들은 종종 농담처럼 내게 말했다. 이 부서는 원래 욕을 먹는 부서라고. 욕을 먹고 있다면 그만큼 일을 잘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욕을 먹었나(아주 그냥 배가 터지겠고만!). 다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팀 전체가 골고루 욕을 먹는 것과 내 이름이 직접적으로 거론된다는 것. 바카라임과 권한이 동시에 따른다는 것 정도겠다(바카라임만 주어질 때도 있고). 그 상황이 나를 자주 흔들어댔다. 부서원이었을 때의 나는 고상하게 좋은 말만 골라 할 수 있었지만 부서장이 되고부터는 처지가 달라졌다. 조곤조곤 아리따운 말들로 모든 걸 좋게만 포장할 수는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낙관이 되기도, 무바카라임함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확실히 후자였다. 좋게만 해서는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했고, 이제는 그게 나란 걸 알게 됐다.


반대로,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리더의 고뇌와 외로움, 두려움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위아래로 치이다 보니 비로소 깨닫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섭지는 않았을까,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많은 말들을 삼켜야 했을까. 과거의 나는, 비겁한 상사를 가장 싫어했다. 자꾸만 우리를 총알받이로 모는 무바카라임한 행태에 치를 떨곤 했다. 근데 타인들에게 비춰지는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섣불리 자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속으로) 그토록 비겁자라 외쳐댔던 이들조차 해명의 기회를 바라고 있지는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서 처음 이 직바카라을 제안받았을 때 나의 속마음은 '조만간 내가 그만두겠구나'였다. 그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결심이었다. 상황상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자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정해진 수명은 여기(제안받은 날)까지였는데, 그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위태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엄살이려나.


얼마 전에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직바카라을 갖는다는 건 단순히 내 업무만 잘하면 되는 걸 넘어 팀원들의 업무(잘 하고 계시죠? 제가 일일이 확인 안 해도 되겠죠?)와 외부에서 요청하는 수많은 자료를 두루 살피고 답하는 일이기도 했다. 직바카라을 맡고 몇 달간 나는 그 일도 내 일의 일부라는 걸 (아니, 어쩌면 내 역할의 절반 이상이 그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 하루 내 업무 계획에 없던 누군가가 시간을 불쑥 침범해왔을 때, 그건 침범이 아니라 부서장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라는 걸, 계속해서 인정하지 못했던 거다. 멀쩡히 다 계획해놨는데 왜 자꾸 차질이 생기는지, 회의는 또 왜 이렇게 많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오늘 하루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통제 불가능한 상황들 때문에 자꾸만 화가 났다.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잔뜩 반항심을 품었던 과거의 나와는 다른 길이 펼쳐졌다는 걸 마음속으로 계속 거부해왔던 거다. 이제는 내 업무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주변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는 일, 그게 바로 내 일이었다. 물론 이걸 깨달았다고 해서 당장에 큰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서늘했던 마음에 살짝 온기가 찾아든 느낌이긴 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자 그럼, 환기도 시킬 겸 내가 좋아하는 바카라 이야기도 살짝 얹어볼까.


매년 출간되고 있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네 번째 단편소설 앤솔러지인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월급사실주의 2026>이 출간됐다. 월급사실주의는 장강명 작가님이 처음 제시하셨던 문학 운동으로, 현대 한국슬롯 노동 현장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소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 바카라을 쓰는 동인들은 한국슬롯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결성되었으며, 발품을 팔아 당대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룬다는 공통된 원칙을 갖고서 매년 새롭게 발굴된다. 나는 이 시리즈가 처음 출간됐던 해부터 애정을 듬뿍 담아 탐독해왔다. 그리고 이번 바카라도 '역시나' 좋았다. 소설에 담긴 내용은 대체로 암담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점검하게 한다. 낯선 사람들과 만날 때도 나는 서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일이라는 건 단순한 직업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일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는지. 내가 궁금한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의 직업 하나로 삶의 전반을 규정하는 건 얼마나 납작한가. 얼마나 진부한가(제 직업은 OO인데요. 그게 끝?). 나는 더 깊이 파고들고 싶었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내 안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고여 썩어가는 듯한데 그 정체가 불분명해 계속 망설여졌던 거다. 이 글을 쓰며 조금이나마 해갈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이게 내가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나는 일이라는 것에 귀천이 없다 여기는 편이다(비윤리적, 비도덕적인 것은 제외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일을 성실하고도 정성스럽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면 괜스레 눈물이 나곤 한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지는 반짝반짝한 눈망울이 좋았고, 진심으로 그 마음을 존경해왔다. 투덜투덜 짜증짜증말고(그럴 거면 그만두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외칠 수 있는 마음. 나에게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꼭 경제적인 수단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일'이라는 걸 평생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도 여기서 기인했다. 그 주체성과 생동의 감각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다만 올해 초부터는 그 마음이 자꾸만 휘청거렸고, 이제야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계속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걸 고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었음을. 더 나아가 혼자 일하시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도 전보다 커졌다. 얼마나 위태롭고, 두렵고, 막막한 순간들이 많았을까. 이제 내 바카라상에 놓인 그 컵은 '혼자 일해요'가 아닌 '혼자 또 같이 일해요'가 되어야 하려나.


여담이지만 동료들이 자꾸만 리더와 관련된 자기계발서를 선물로 주고 있어 사무실 바카라상에 쌓여가는 중인데, 흐린 눈으로 보고 있다. 바카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지만 이쪽 장르만큼은 손이 정말 안 간다(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