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계리에서

《배진성 시인의 소설시》이어도공화국 꿈삶글노래

by이어도공화국

《배진성 시인의 소설시》

이어도공화국 꿈삶글노래




40. 사계리에서


송악산에서 산방산으로 간다

절울이오름에서 사계리로 간다

사계리 해안에서 형제섬을 본다

아주 먼먼 옛날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아있다

뜨거운 용암을 등지고 바다로 뛰어가다

용암에 먹히고 말았을까 아니면 바다로

뛰어들어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을까

나는 송악산에서 산방산으로 간다

산방산은 백록담을 엎어서 놓았다

나는 저 산 안의 방에서 살아도 좋겠다

산방산 안으로 간다


상모리에서 사계리 해안으로 간다

죽을 끓이다가 죽솥에 빠진 설문대할망,

죽솥에서 어머니의 뼈를 보고,

어머니를 먹은 형들과는 함께 살 수 없어

이곳까지 와서 매일 삼천 배를 올렸다는

오백장군 형제들의 막내 둘,


형제섬을 보면서 사람발자국 화석에

나의 발을 맞춰본다 소와 사슴 발자국에

나의 발을 대어본다 매머드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넣어본다


나는 아주 먼 옛날에 무엇으로

살다가 떠나갔을까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의 모래밭에서 사랑하는 그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아주 먼 다음에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


사계리(沙溪里)는 계절로도 흐르고

검은 모래의 시내도 흐른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흐르듯

화산폭발과 함께 검은 재들이 흐른다

검은 재들은 바위가 되고 바위는 흘러

모래가 된다 모래는 파도에 쓸려간다

묻혀있던 발자국들이 되살아나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바다로 걸어가는 쌍봉낙타가 있다

사막을 건너온 낙타가 바다로 간다

형제섬에서는 낙타의 등이 보인다

형제섬에서는 돌고래가 노래를 한다


사계리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다시 쓰고

단테는 『신곡』을 다시 노래한다

나와 윤동주 시인은 돌림노래를 하며

서로 한 곡씩 더 부르며

사계리(沙溪里)에서 사계리(四季里)로 간다










1. 연어의 종착역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2.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한 것인지 그러냐

오랜만에 네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텔레비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러면, 시인 한 달 월급이 월마나 된다냐

먹고 살 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씨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 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3.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 연(鳶)


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보리논에서

솟아오르곤 했다 하늘을 들이받으며 뻑뻑하게

거슬러 올랐다 구름의 층계를 밟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 위에

비스듬히 떠오르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높이

이마에 별을 달고 떠 있는 방패연이

부러웠다 꼬리를 잘라 버린 마음으로

떳떳한 어깨는 떵떵거리고 있었다

나는 꼬리 끝까지

온몸으로 흔들리는 그리움으로

기어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단하게 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내 몸에 몰아쳤다 얼레가 정신없이 헛돌아

풀렸고 끈을 묶은 아버지 허리가

부서져 내렸다 너무 먼 곳에서 다시 내려다보았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겨울 허수아비가

꿈속으로 보였다 연실을 타고 올라온 소식

침 발라 붙인 편지가 아버지 목숨처럼 떨어졌다

나는 끈을 따라 내려가 음복 같은 바람에

취한 몸으로 땅에 깊이 엎드려야만 했다

끝내 나는 그렇게 겨울 밖으로 날아가지 못했다



5. 팽이


헛발 딛는 내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곁에서 어머니는

옷고름 풀어 만든 팽이채로

아픈 허리를 감아 주셨다

어머니가 지쳐 쓰러진 만큼

나는 바로 설 수 있었고

발아래 흐르는 강물 소리에

늘 젖어있는 몸이었다

그러한 겨울은 따뜻하였고

겨울 밖에서도 오오래, 오오래

무지개를 감아 들이며

제자리서기로 돌고 싶었다



6. 등이 환하다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7. 정우야 잘 있느냐


초등학교 졸업한 날 밤에

네 집에서 졸업 파티 하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의정부로 전학 갔던 친구에게 고백하던

그날 밤 너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 함께 울던

네 집 앞 정자나무도

징검다리 아래

여울물소리도 잊을 수 없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환갑 기념으로

한라생태숲에서 받아온

감나무와 산딸나무를 심으면서

너를 생각한다

너무 빨리 먼 길 가버린 너를 생각한다


너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빨랐지

달리기를 잘했고 축구를 참 잘했지

그렇게 모든 것들이 빨랐던 너는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저승까지도 빨리 가고 말았느냐


나도 너처럼 빨리 달리고 싶어서

달밤에 홀로 운동장을 달렸단다

하지만 나는 너무 숨이 차서

달리지 못했단다

그렇게 나는 선천성 심장병을 알았단다

나와 함께 달리던 별과 달도 울었단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못했단다


이곳은 지금 한창

벚꽃과 유채꽃이 환하다

너 사는 서천꽃밭에는 어떤 꽃 피었느냐

고사리도 고사리장마에 잘 크고 있구나


너를 생각하며 오늘 심은 감나무에

감이 열리기 전에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

너는 어쩌면 그곳에서도 친구들을 불러

재미있게 놀고 있을 것만 같구나


제주도 사람들은 꼭 제사상에 고사리를 올린단다

제사 음식을 고사리 멜빵으로 짊어지고 올라가서

산동네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뜻이란다

나도 올해는 고사리 꺾으러 가야겠다

고사리 멜빵에 내 마음 짊어지고 너에게 가야겠다


위리안치에 갇혀 살다 보니

너를 배웅도 하지 못했구나

이제라도 너의 유택을 찾아가야만 하겠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미리 알아두어야만 하겠다

여기서 못다 한 우리들의 우정

거기서 다시 꽃을 피우자, 정우야



8. 나의 꿈 하나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과,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산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그들의 아픈 가슴에도,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자연의 큰 거울 앞에서, 희망을 되찾은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겨울이 깊을수록, 더 잘 보이는 길, 실패한 사람을, 함께 이끌어주고, 넘어진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우리들이 함께 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9.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10.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11.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둘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셋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다녔다


넷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 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12.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13. 계절이 징검다리처럼


나의 계절은 가을로 깊어간다

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가을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단풍이 돼라한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한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돼라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돼라한다

봄으로 다시 꽃 피는 가을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이 먼저 징검다리 건너간다

계절이 흘러가는 강물에

가을바람이 먼저 가서

겨울의 징검돌을 놓는다

봄으로 가는 징검돌을 놓고 있다



14. 월대천 징검다리


월대천 끝에 징검다리 있다

바다 입구에 징검다리 있다

한라산 물, 바다로 내려간다

바닷물 한라산 쪽으로 간다

월대천과 제주 바다의 경계,

썰물에는 은어들이 내려가고

밀물에는 실뱀장어 올라온다

썰물에는 사람들이 건너가고

밀물에는 바닷물이 건너온다

강아지는 사람과 함께 건너고

참게들은 사람들 몰래 건넌다

나는 징검다리 입구에 눕는다

팽나무 아래 거꾸리에 눕는다

나무 끝으로 올라가는 물소리

물관 속으로 올라가 눈을 뜬다

여울물소리는 봄 잎으로 피어

기지개 켜며 하늘 걷기를 하고

나의 마음은 구름을 따라간다

알작지 몽돌 보고 와불도 본다

관탈섬도 보고 추자섬도 본다

광양포구 정병욱 본가도 본다

마룻장 아래 숨겼던 원고 본다

섬진강을 따라 반월산에 간다

연어의 종착역까지 따라간다

늦게, 돌아온 왜가리 한 마리

오늘 밤에도 저녁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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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땅의 뿌리><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에서><길 끝에 서 있는 길><꿈섬><우리들의 고향><서천꽃밭 달문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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