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색깔로 사람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면 얼굴보다 먼저 색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처음 사랑했던 사람, 태오는 늘 회색이었다. 소란스러운 자리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고, 화가 날 만한 순간에도 표정 하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 무채색의 침착함이 스무 살의 지수에게는 안전지대처럼 느껴졌다.
반면 지수 자신은 초록이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듯 마음이 바뀌었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쉽게 자라났다가 시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태오는 뿌리 같은 존재였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붙잡아주는,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
연애는 이 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도시로 가야 했고, 각자의 삶이 바빠졌고,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졌다. 헤어지자는 말도 정확히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흐려졌다.
그 후로 지수는 몇 번의 연애를 더 했다. 다정한 사람도 있었고, 열정적인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회색이 떠올랐다. 지금 만나는 사람과 다투고 난 밤이면 문득 태오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삶에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그를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태오는 그사이 임상심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고, 수련을 받고, 상담실에서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안부를 묻는 문자가 오갔다. 새해가 되면, 혹은 서로의 생일 즈음에. 그 정도의 거리를 두 사람 다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해 봄, 지수의 삶은 갑자기 무너지듯 흔들렸다.
오래 만난 애인과 헤어졌고, 다니던 회사에서는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 두 가지가 한 달 사이에 겹쳐서 일어났을 때, 지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초록이 아니라 그냥 말라가는 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까운 친구들의 얼굴이 아니라 태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가 상담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편리한 핑계가 되어주었다. 지수는 자신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냥 상담이 필요해서, 마침 아는 사람 중에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뿐이라서.
"그래 나 임상심리사 수련 중이거든.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태오가 답장을 보내왔다. 예의 그 담담한 어투로.
지수는 며칠을 망설이다가 다시 연락했다.
"도와줄 수 있어? 어떤 상태인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답장은 이틀 뒤에 왔다. 평소보다 긴 문장이었다.
"네가 나한테 이성적인 생각이 있어서 상담관계는 안 될 것 같고, 나 말고 다른 전문가한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지수는 그 메시지를 세 번쯤 다시 읽었다. 화면 속 글자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놀랍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정확한 진단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기고 있던 것을 남이 먼저 알아챈 순간의, 서늘하고도 후련한 느낌.
지수는 한참을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막 돋아난 여린 초록 잎들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태오에게 원했던 것은 상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힘든 일을 해결해 줄 조언이 아니라, 이 힘든 이야기를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언제나 태오였던 이유는, 그가 유능한 상담사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만은 어떤 모습이든 보여도 괜찮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장을 썼다.
"그럴 수 있겠네. 상담받으러 갔었는데 도움이 안 돼서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생각하다 너 생각나서 연락했었어. 뭔가 너한텐 못난 모습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았나 봐. 신경 써줘서 고마워."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지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슬퍼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것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태오가 선을 그은 것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오히려 그가 지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배려였다. 상담자와 내담자로 만났다면, 지수는 또 한 번 그 회색 안에 자신을 기대려 했을 것이다. 태오는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지수가 스스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돌려준 셈이었다.
그날 밤 지수는 오랜만에 첫사랑을 떠올리며 울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다음 날 그녀는 회사 근처에서 소개받은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았다. 낯선 상담사의 이름을 수첩에 적으며, 지수는 문득 태오를 떠올리지 않고도 그 이름을 적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주 뒤, 태오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잘 지내?"
지수는 창밖의 나무를 보며 답장을 썼다.
"어. 요즘은 진짜 잘 지내는 것 같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직도, 이별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지만,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회색 하나를 내려놓은 지수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초록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계절을 따라 자라고, 흔들리고, 다시 짙어지는 원래 그랬던 자신의 색으로.
태오는 태오대로 자신의 회색을 살아갈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에게 다른 무게로 존재했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지수는 생각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오래전에 사두고 펼쳐보지 않았던 바카라을 집어 들었다. 태오가 예전에 추천해 줬던 바카라이었다.
이제는 그저 좋은 바카라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