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조각들

반야심경, 구운몽, 불교는 왜 진실인가

byxprnsv





0. 틈에 대하여



느리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 당신은 한강에서 오리배를 타고 있다.


뒤에서 충격이 전해진다. 다른 배가 와서 부딪혔나보다. 무슨 범퍼카도 아니고. 순간 분노가 치민다. 급하게 돌아보자, 텅 빈 배가 있었다. 바람에 떠내려온 빈 배. 나는 민망함에 머쓱해졌다.


왜 처음에 화가 났을까. 단순히 배가 부딪혔기 때문이 아니다. '부주의한 누군가가 내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건과 감정 사이, 그 찰나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끼어든다.


심리학자 알버트 엘리스는 그것을 B라고 불렀다.


A (Activating event) 사건.

C (Consequence) 결과.

B (Belief) 신념과 해석.


우리는 보통 A가 C를 만든다고 믿는다. 배가 부딪혔으니 화가 난다고. 그러나 분노의 원인은 충돌이 아니다. 충돌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언제나 분노를 만든다. 세계는 사건을 일으키지만, 고통은 사건이 만들지 않는다. B가 원인이다. 언제나 B가 스토리를 만든다.


그렇다면 B를 바꾸면 된다. 간단해 보이지만, B는 언제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한다.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해석은 이미 완료되어 있다. 감정이 올라오고, 몸이 먼저 반응하고, 그 다음에야 '내가 화가 났구나'를 의식한다. 의식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사건과 감정 사이의 틈, 그 미세한 간격 안으로 의식을 밀어 넣는 것. 틈이 생기면 선택이 생긴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님 말고. 오히려 좋아. 이 주문들은 그 틈 안에서만 효력을 갖는다.






프롤로그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돌아온 영웅의 배가 아테네 항구에 정박해 있다. 시간 앞에서 나무는 썩어간다. 시민들은 위대한 영웅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한 조각씩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기로 한다. 그렇게 한 조각 한 조각씩 교체된다.


수 년이 흐른다. 돛대가 교체되고, 노가 바뀌고, 키가 새것으로 대체된다. 뱃머리의 장식까지. 어느 날 항구를 거닐던 철학자가 문득 멈춰 선다. 교체된 판자들을 모아 다시 조립한 배가 옆에 서 있다. 낡고 썩은 나무로 된 배. 그리고 새 나무로 빛나는 배. 두 척의 배 사이에는 공통된 재료가 하나도 없다.


철학자는 묻는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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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본다. 세포들은 끊임없이 교체된다. 피부 세포는 한 달마다, 위벽 세포는 며칠마다, 혈액 세포는 몇 개월마다. 뼈 세포도, 신경 세포조차도. 온몸의 세포가 전부 교체되는 데 약 칠 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 순간 거울 속에서 나를 보는 나와, 칠 년 전 같은 자리에 있던 나는 단 하나의 세포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나이게 하는가. 무엇이 이 불안정한 다발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두는가.


기억, 의식, 영혼, 그 무엇도 본질적 답이 될 수 없다.


2,500년 전 붓다는 말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몸·느낌·생각·의지·의식—의 임시적 결합에 불과한 무더기일 뿐이라고. 오온개공五蘊皆空, 그리고 이 모두는 비어있으며. 제법무아諸法無我,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에 고정된 자아란 없다고.


테세우스의 배는 단순한 사고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배를 타면서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불가사의한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정체성, 동일성, 연속성. 나는 묻는다.

이 배는 '진짜'인가.






I. 色 — 물질의 환상



손바닥을 바라보며 양자역학을 떠올린다. 손의 살과 뼈를 이루는 원자들 사이의 거리는 태양계만큼 넓다. 원자핵을 축구공 크기로 확대하면, 가장 가까운 전자는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다. 그 사이는 아무것도 없다. '물질'이라 믿는 모든 것의 99.9%는 사실 텅 빈 공간이다.


진공. 허공. 공空.


손은 분명 여기 있다. 온기와 무게가 느껴진다. 나는 이 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토마스 영의 이중슬릿 실험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본다'는 것, '있다'는 것, '믿는다'는 것의 근간을 흔들었다. 미시세계에서 전자는 관측하기 전까지 확정된 위치를 갖지 않는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이다. 있으면서 있지 않은 상태.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형태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형태와 다르지 않다.


물론 물리학과 불교 간의 이 연결은 경계되어야 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과 나가르주나의 '공'은 서로 다른 언어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양자역학은 측정과 관측자의 문제이고, 나가르주나의 공은 존재의 관계적 발생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언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저 뇌가 만들어낸 패턴 인식일 것이고, 패턴을 보고 싶어하는 뇌가 서로 다른 두 진술에서 공명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할 테다. 그럼에도 이 공명은 나에게 무언가를 건드린다.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바닥에 딛는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 이 접촉은 사실 접촉이 아니다. 내 발바닥의 전자들과 바닥의 전자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전자기력일 뿐이다. 나는 평생 어떤 것도 진정으로 '만져본' 적이 없다.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접촉은 척력의 환상이다.


나가르주나는 공성空性은 허무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공은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컵이 비어있기에 물을 담을 수 있고, 방이 비어있기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내가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기에, 나는 매 순간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


사찰의 노승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물로 붓글씨를 쓴다. 여름 햇살 아래 글씨는 쓰는 족족 마른다. 형태가 생겨나는 동시에 사라진다. 무상無常의 가르침을 무상하게 전하는 방법. 존재하는 순간이 곧 사라지는 순간이라면, 우리는 언제를 살고 있는 것일까.


손바닥을 다시 바라본다. 공空과 색色 사이 어디쯤에서 이 손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II. 受 — 느낌이라는 주인



로버트 라이트는 『불교는 왜 진실인가』에서 불교를 진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느낌은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진실보다 생존. 자연선택은 우리를 속인다.


현대인은 사바나에서 살도록 설계된 몸과 마음을 가지고 현대를 살아간다. 뇌는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위협으로 해석한다. 자원의 손실. 서열의 하락. 지위의 추락.


느낌은 나를 지배한다. 고칼로리 음식을 보면 침이 고인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의 유산. SNS에서 타인의 성공을 보면 불안해진다. 부족 내에서의 서열이 생존을 좌우했던 시절의 유산. 보복 운전을 하고 싶은 충동. 자원을 두고 경쟁하던 시절의 유산.


이 느낌들은 과거 한때는 생존에 유리했으나 지금은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 단 음식에 대한 탐닉이 당뇨를 부르고, 타인과의 비교가 우울을 부르고, 분노가 범죄를 부른다. 우리는 업데이트되지 않은 운영체제로 최신 프로그램을 돌리려는 낡은 컴퓨터와 같다.


'쾌락의 쳇바퀴'도 마찬가지다. 새 옷을 샀을 때의 기쁨, 승진했을 때의 만족, 연인과의 첫 키스. 이 모든 좋은 느낌은 예상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리고 좋은 느낌이 끝난 뒤에는 더 많이 원하는 불안한 느낌이 따라온다. 새 옷을 사고 나면 또 다른 새 옷이 필요하다. 승진을 하고 나면 다음 승진을 원한다.


만족은 순간이고, 갈망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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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은 우리가 자아라고 여기는 작은 일부가 아니라, 어쩌면 자아의 핵심에 더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매순간 우리가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느낌이다. '내'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날 뿐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느낌들이 경쟁한 결과 어떠한 느낌이 이긴 것뿐이다. 이성은 느낌들 사이의 중재자일 뿐, 결코 주인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B는 느낌들이 만든다. 진화가 우리 안에 심어놓은 오래된 공포와 욕망이 해석의 형태로 굳어진다. 느낌으로 인해 생성되는 자동적 판단은 오래된 생존 본능의 언어다.


그러나 그 느낌조차 텅 비어있다.






III. 想 — 인식의 좁은 창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과학주의는 진리에 가장 근접한 사상이자 맹목적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작 380nm에서 750nm 사이, 가시광선이라는 좁은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 전자기 스펙트럼의 이 작은 범위를 벗어난 것들—자외선과 적외선, X선과 감마선, 전파와 마이크로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을 관통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수십만 개의 와이파이 신호가 내 뇌를 통과하고,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가 내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지각할 수 없을 뿐. 감각이 실재의 전부라 믿는 무지와 오만. 우리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야코프 폰 윅스퀼은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각 생물이 지각하는 고유한 환경세계. 박쥐는 초음파로, 뱀은 적외선으로, 개는 냄새로, 별거미는 진동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인간의 움벨트, 즉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피부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스스로의 감옥 안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우리는 박쥐의 뇌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박쥐'로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타인'으로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 전에, 나 자신'으로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칸트는 우리가 사물 그 자체, 즉 물자체Ding an sich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상Phänomen뿐이다. 시간, 공간, 인과율—이것들은 세계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경험을 처리하기 위해 덮어씌우는 틀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에 형식을 부여할 뿐이다.


그렇다면 실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빛이 없고, 색이 없고, 소리가 없고, 표면이 없다. '빨강'은 특정 파장이 망막을 자극할 때 뇌가 만들어내는 내부 사건이다. 파장 자체에는 색이 없다. '소리'는 공기의 압력 변화가 달팽이관을 진동시킬 때 뇌가 구성한다. 그 압력 변화 자체는 침묵이다.


세계는 뇌 바깥에 있지만, 세계의 모습은 뇌 안에 있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공空은 신비주의가 아닐지 모른다. 물자체에 대한 직관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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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문제는 인식의 왜곡으로도 이어진다.


배고픈 판사는 더 엄한 판결을 내린다. 점심 직후의 판사는 더 관대해진다. 정의라는 것이 혈당 수치에 좌우된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간밤에 어떤 꿈을 꾸었는지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스쳐 지나간 광고 카피 하나가 생각의 방향을 미묘하게 굴절시킨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물자체가 아니라 물자체로부터 뇌가 구성한 그림자이다. 따라서 B는 현상에 대한 현상이다. 이중으로 굴절된 이야기. 테세우스의 배처럼, 우리의 신념도 끊임없이 교체되는 임시적 구성물이다. 신념의 체계 역시 마찬가지다. B는 내가 선택한 해석이 아니다. 뇌가 진화적으로,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다. 이처럼 B가 왜곡되고 유동하는 것이라면, 알아차림 이후에도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IV. 行 — 의지의 착각



그런데 손전등으로 어둠을 비추다가, 문득 그 손전등을 들고 있는 자를 감지한다.

B를 바꾸는 주체, 그 틈 안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누구인가.


A와 C 사이의 틈에서, 나는 전혀 다른 질문 앞에 섰다.

자아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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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 안에는 수많은 하위 시스템이 존재한다. 각각의 모듈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지며 때로 지배권을 놓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장기적 이익을 계산하는 전전두엽 모듈. 즉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변연계 모듈. 슬롯적 인정을 갈구하는 모듈. 안전을 우선시하는 모듈. 이 모듈들이 순간순간 힘겨루기를 한다.


즉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말하는 의회다. 때로는 민주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지만, 대부분은 쿠데타로 정권이 바뀐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나'는 단지 그 순간 승리한 모듈의 이름에 불과할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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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가자니가는 뇌량이 절단된 환자들을 연구했다. 뇌량을 자르면 좌뇌와 우뇌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독립된 존재가 된다.


가자니가는 분리뇌 환자의 '우뇌'에게 '걸어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가자니가가 물었다. "왜 걷고 있나요?"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는 우뇌가 받은 메시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좌뇌'는 당황하지 않았다. 즉시 대답했다. "콜라를 가져오려고요."


좌뇌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시작하지 않은 행동을 보고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자니가는 이것을 '해석기interpreter'라고 불렀다. 좌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든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행동에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에도. 언제나 그럴듯한 서사를 덧씌운다.


크리스토퍼 나이바우어는 『뇌는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에서 말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좌뇌가 바로 '나'라고 느껴지는 것의 정체가 아닐까. '나'는 실체가 아니라 좌뇌가 쉬지 않고 생성하는 내러티브다. 과거의 기억을 엮고, 미래를 상상하고, 현재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기계. 그 기계가 만들어낸 주인공의 이름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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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조종하는 선장은 없다. 배는 그저 항해하고, 선장처럼 보이는 목소리는 그 항해를 사후에 설명할 뿐이다.


배가 부딪혔을 때 좌뇌 해석기는 즉시 작동했다. '부주의한 누군가가 나에게 피해를 끼쳤다.' 선택한 해석이 아닌, 0.1초 만에 자동 생성된 이야기.


벤자민 리벳은 피험자에게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뇌파를 측정했다. 결과는 믿기 힘들었다. 의식적 결정보다 0.5초 먼저 뇌 활동이 시작된다. 최근 실험들은 이 시간을 더 늘려왔다. 5초. 7초. 10초.


자유의지라고 믿어왔던 것은 무의식적 과정의 사후 보고였다.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정을 의식한 것뿐이다. 주인공이 아니라 해설자. 행동은 이미 일어나고, 이야기는 그 뒤에 덧붙는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일어날 뿐이다.






V. 識 — 의식이라는 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순간을 생각한다. 의식이 스러지는 경계. 거기서 '나'는 서서히 희미해진다. 잠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전신 마취를 한 적이 있다. 수술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하나, 둘, 셋." 셋을 세는 순간과 회복실에서 눈을 뜬 순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의 느낌도, 시간의 감각도 없었다. 그저 사막같은 꿈뿐이었다. 의식이 깨어나자 기억이 돌아왔다. 기억이 돌아오자 '나'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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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0일 아침, 하버드 대학의 신경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를 하다가 왼쪽 눈 뒤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뇌출혈이었다. 좌뇌의 혈관이 터지고 있었다. 그녀는 신경과학자였기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좌뇌의 기능이 꺼지기 시작했다. 언어가 사라졌다. 과거가 사라졌다. 미래가 사라졌다. 이름이 사라졌다. 그리고—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공포 대신 고요함이 밀려왔다. 경계가 사라지는 느낌. 자신과 세계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느낌. 『나는 내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고.


'나'라는 해석기가 멈추자, 그 자리에 공포가 아니라 평화가 찾아왔다. 그녀는 8년의 재활 끝에 회복했다. 좌뇌가 다시 켜졌다. 언어가 돌아왔다. 이름이 돌아왔다. '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재건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이바우어는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와 『하마터면 깨달을 뻔했네』에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좌뇌의 해석기가 만드는 자아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이 자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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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과 『구운몽』을 생각한다. 장자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자인가. 성진의 삶이 진짜인가, 양소유의 삶이 진짜인가. 일장춘몽一場春夢. 깨어나고 보면 모두 한바탕 꿈이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양소유는 사랑했고, 슬퍼했고, 욕망했다. 그 고통은 진짜였다. 꿈인 줄 알고 난 이후에도—성진은 여전히 이 세계 안에 있었다.






VI. 空 — 비어있는 배



겨울 아침,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하얀 눈송이 하나가 창문에 닿았다가 녹는다. 몇 초의 존재.


눈송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 분자. 그 물 분자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 그 원자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 계속 파고들어가면 결국 무엇을 발견하는가. 끈 이론에 따르면, 모든 입자는 진동하는 끈이다. 더 이상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관계이고, 패턴이고, 과정이다. 물질은 사라지고 관계만 남는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말한다. 연기緣起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따라서 공空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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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송이를 생각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 이 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땅. 그 땅을 이룬 광물과 미생물. 물. 그 물을 증발시킨 태양. 햇빛. 그 빛을 만든 핵융합. 공기. 그 공기를 만든 수십억 년의 광합성. 씨앗. 그 씨앗을 만든 작년의 꽃. 정원사의 손길. 수백만 년의 진화. 빅뱅.


틱낫한 스님은 이것을 "상호존재inter-being"라고 불렀다. 꽃 안에는 우주 전체가 들어있다. 꽃의 본질은 '꽃 아닌 것들'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내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수십억 년 전 죽은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탄소, 질소, 산소—이 모든 원소는 별의 핵융합에서 왔다. 별이 초신성 폭발을 일으킬 때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고, 그것들이 다시 모여 태양계를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생명을 만들고, 나를 만들었다.


내 생각은 부모에게서, 선생님에게서, 바카라에서, 대화에서 왔다. 한글로 생각하는 나의 의식은 세종대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내 감정은 문화와 언어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정情'이나 '한恨'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다르다.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독립적인 본질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우주 전체와의 관계망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의 본질은 '나 아닌 것들'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말한다. "우리는 별의 물질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우주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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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138억 년의 우주에서 임시로 조합된 패턴, 또는 좌뇌 해석기가 실시간으로 생성한 이야기.


2008년 2월 10일 밤, 숭례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TV 화면으로 그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무와 돌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에 대한 헛된 애착일까. 아니, 숭례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장인들이 쏟아부은 땀이었고, 600년을 지나온 시간이었고, 한국인의 집단적 정체성이 얽힌 관계의 매듭이었다. 불에 타서 사라진 것은 나무와 돌이 아니라 그 관계들이었다.


숭례문은 재건되었다. 수천 그루의 소나무와 수천 톤의 화강암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원래의 숭례문인가. 테세우스의 배, 우리는 또다시 이 질문 앞에 선다. 원래의 숭례문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숭례문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의 매듭이었다. 세포가 교체되듯, 나무가 교체되듯, 기억이 재구성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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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더욱 소중하고, 모든 것이 무아이기에 더욱 연민할 만하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금방 져버리기 때문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각 순간의 절대적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다.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


공空은 허무가 아니다. 공은 모든 가능성의 조건이다. 고정된 본질이 없기에 변화가 가능하다. 변화가 가능하기에 성장이 가능하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상실이 아닌 자유. 테세우스의 배처럼, 나는 끊임없이 재건된다.






VII. 부조리의 해변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사랑도, 우정도, 예술적 감동도 모두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DNA의 자기복제를 위한 운반 기계에 불과하다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도, 베토벤의 교향곡도,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도—모두 진화적 적응의 산물일 뿐이라고.


그런데 기묘한 일이다. 애초에 자유의지 따위가 없기에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행복하고,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고, 연인과의 이별에 슬퍼한다. 허무주의는 이론 속에서만 작동한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계속 느끼고, 계속 감각하고, 계속 반응하고, 계속 살아간다. 이 간극은 나를 더 오래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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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고양이를 챙기고 출근하고 커피를 마신다. 무의미한 일을 무의미하게 반복한다. 그리고 가끔은 웃기도 한다.


부조리. 카뮈가 이름 붙인 이 균열—의미를 갈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우주 사이의 균열—은 해소되지 않는다. 부조리를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신앙으로 뛰어넘거나, 자살로 끝내거나. 카뮈는 둘 다 부조리 앞에서의 도주라고 불렀다. 세 번째 길이 있다. 부조리를 직면한 채,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반항.


수십억 년 후 태양은 팽창하여 지구를 삼킬 것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 인류는 멸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나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절망의 순간, 오히려 무언가가 가벼워진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특별해야 한다는 조급함,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이것들은 사실 족쇄라는 것을 깨달았다. 족쇄인 줄 모르고 차고 다녔던 족쇄.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 된다. 목적이 없다면, 과정 자체가 목적이면 된다. 자유의 현기증을 느낀다면, 멀미약을 먹으면 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위협이 아니라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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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린다. 이 삶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무한히 반복된다면,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어떤 이야기를 쓰느냐는 중요하다. 고통을 만드는 이야기가 있고, 덜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해석기는 멈추지 않기에, 어차피 이야기는 계속 생성된다. 그렇다면 조금 더 너그러운 이야기를, 조금 덜 집착하는 이야기를 써야 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살아지기에 살아갈 뿐이다.






에필로그



그저 알아차린다. 충동이 일어나는 순간, B가 생성되는 찰나, 해석기가 이야기를 만드는 지점을 바라본다. 이 간격은 중요하다. 틈이 있으면 선택권이 생긴다. 물론 선택하는 주체가 환상일 뿐이래도, 어쨌거나 이 현실에서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기에.


생로병사 성주괴멸 오온개공

生老病死 成住壞滅 五蘊皆空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切皆苦 諸行無常 諸法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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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무아를 깨달을 수 있을까. 아니면 깨달음을 소재로 그저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게 될까. 아마 후자겠지. 좌뇌 해석기는 깨달음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으므로, 무아를 이해했다는 새로운 자아를 즉시 구성할 테니까.


기실 나는 우연히 조합된 원자 무더기이고, 좌뇌 해석기가 생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고작 그런 원자 무더기가, 우주를 사유하고,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사랑을 창조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불완전하게 깨어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야겠다. 그것만이 우주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이기에.


그리하여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저 나라는 배가 여전히 바다를 건널 수 있느냐는 것, 여전히 사랑할 수 있고, 아파할 수 있고,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 있느냐는 것일지도.


그렇게 테세우스의 배는 오늘도 어딘가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매일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되어가는, 이 불가사의하고 비어있는 항해를 계속하면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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