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스, 볼리비아
사마이파타에 다녀온 뒤 가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탓에 바닥에는 구겨진 영수증과 과자 봉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꺼내 버렸다.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위쪽에 얹혀 있던 문법 교재를 들어내자, 반으로 접힌 종이와 모서리가 닳은 수첩 몇 권이 한꺼번에 기울어졌다. 여기 와서 처음 샀던 단어장이 그 밑에 있었다. 표지 안쪽에는 검은 펜으로 이름을 적어두었고, 첫 장에는 지금은 굳이 뜻을 생각하지 않아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 빼곡했다.
2년 전, 처음에는 인사 한마디에도 준비가 필요했다. 전날 밤에 적어둔 문장을 미니버스 안에서 몇 번씩 읽고, 막상 교실 문을 열면 끝부분을 잊어버려 웃음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헤실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그것이 질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면, 아이들은 처음보다 훨씬 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해주었다.
다음 장을 넘기다가 낯선 필체를 발견했다. 내 글씨보다 크고, 줄 위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한 글자들이었다. 그 옆에는 내가 한국어로 뜻을 덧붙여놓았다. 누가 써주었는지 얼굴까지 떠올리려 했지만, 비슷한 오후들이 겹쳐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수첩의 가운데쯤부터는 단어 사이에 아이들의 이름이 끼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앉은 채 그것들을 한 장씩 넘겼다. 버릴 종이를 골라내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버릴 것이 없었다.
귀국까지는 2주.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만 수업을 마무리하고 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남은 날들은 금방 지나갈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간 다음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누가 물으면 일단 좀 쉬면서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져갈 종이를 가방에 넣고서야 겨우 짐 정리를 멈췄다. 열린 캐리어를 벽 쪽으로 밀어놓았다. 방 한가운데 바닥이 다시 드러나자 아직 아무도 떠나지 않았는데 방이 조금 넓어진 듯했다.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에도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먼저 온 아이들이 뒤쪽에서 의자를 끌고 있었고, 창가에 앉은 아이는 바카라상 위에 엎드려 친구가 하는 말을 듣다가 내가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이 곳은 항상 추웠다. 창문 틈으로 바닥을 살짝 훑으러 들어온 햇빛이 빼꼼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늘 두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칠판에 남아 있는 글씨부터 지웠다. 손잡이가 헐거워진 지우개를 쥐는 감각도 전날과 같았다. 언제나처럼 수업을 했고, 언제나처럼 아이들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또각거렸다. 수업을 끝내고 나눠주었던 종이를 걷는데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처음 내 손을 잡아끌던 때보다 키가 자라 있었다. 빠진 앞니 자리에는 새 이가 올라왔고, 웃을 때마다 혀를 내밀어 빈 곳을 만지던 버릇도 어느새 없어져 있었다.
“한서, 다음 주에는 안 와?”
나는 걷어 든 종이의 모서리를 바카라상에 맞추다가 손을 멈췄다.
“수업은 오늘까지. 다른 일 때문에 학교에는 조금 더 올 거야.”
“그다음엔 한국 가?”
“응.”
마리아는 잠깐 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비행기표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지퍼가 벌어진 틈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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