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를 두드리는 순간
온라인 게임 동료들과 함께 여행 가는 일정을 잡은 적이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저마다 달라 결정을 못하던 중, 내가 무심코 한 마디 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나요."
그날 정해진 여행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여행한 사람들과의 시간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때도 여행의 울림은 장소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얼마 전『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의뢰를 받아 대신 여행을 떠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타인이 대신해 주는 여행은 갈망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채워주지는 못한다.
여행을 대신하면서 만난 사람과 풍경은, '여름'의 것이었다. 그 여행으로는 의뢰인의 삶을 채울 수 없다. 공교롭게도 드라마는 인물들이 자신의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행은 결국,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의 것이다.
불로동 고분군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고분의 모습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날 함께 갔던 검은 털의 삽살개 '까미'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어쩌다 보니 더위를 타는 녀석을 챙기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남긴 흔적도 정리해야 했다. 커다란 덩치의 녀석이 낯설었던 탓에 주변 풍경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녀석을 미용샵에 맡기고 나서야 겨우 점심을 먹었다.
식당을 나서는 순간, 담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알록달록 색칠한 담장, 그 위에 걸린 폐타이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폐타이어에 곱게 색칠을 하고, 흙을 담아 꽃을 심어 두었다. 그 손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삶이 나를 두드렸다.
샵에서 '까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많이 웃고 있었다. 앞발로 무릎을 툭툭 건드리는, 까만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어떤 날은, 무언가가 심장으로 들어온다.
그게 나에게는 여행이다.
드라마가 끝날 즈음,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혼자 떠나는 날이 생겼다. 함께하는 '누구'는 가는 곳마다 달랐다. 친구를 만나고, 풍경을 만났다. 그리고 풍경 속에는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나는 어떤 풍경을 꼭 보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그 순간 숨 쉬는 것들을 만나러 간다.
그저 떠난다.
그곳에서 삶이 다시 나를 두드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