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살 아저씨가 돈 내고 맞으러 다니는 이유

"무료한 중년의 인생에 건강과 활력을 주는 취미를 찾았습니다"

by이드id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건강하게 조금이라도 더 인생을 즐기고 싶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5개월째 복싱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웬만하면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운동을 갑니다. 나이가 들고 직급도 있다 보니 원치 않는 저녁 자리에 끌려갈 일도 별로 없고, 이제는 제 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죠. 아플 때나 공식적인 회식 날 빼고는 복싱장에 빠진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학원에 절대 빠지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문제는 빠지지 않는 것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공부도 그렇지만, 복싱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생 때 쿵후 도장에 다니면서 앞뒤로 재주도 넘어본 터라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49살에 복싱을 시작하면서도 '그래도 운동 좀 해본 사람인데'라는 마음이었죠.


제 나이를 잠시 깜빡한 거죠. 쿵후 이후 28살을 마지막으로 헬스장에 다닌 이후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려줬습니다. 마을버스를 타려고 조금만 뛰어도 심장이 터질 것은 제게, 복싱은 예상보다 훨씬 고강도 운동이었습니다. 체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체력도 달리고, 몸도 무겁고 동작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아, 나 복싱에 재능이 없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관장님의 반복되는 지적이 그 증거였습니다.


'하, 나이 50에 이게 무슨 일이지?'


하루하루 건강해진다는 생각으로 잘 적응했습니다. 복싱 선수를 할 것도 아니고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니까요. 매일 운동하러 간다고 사실에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6개월을 꾸준히 다녔습니다. 복싱 연습은 물론, 몸풀기 스트레칭, 러닝머신, 사이클, 줄넘기도 매일 열심히 했습니다. 잘 견딘 결과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건강검진에서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지방간이 거의 사라졌다는 겁니다. 심지어 건강 나이가 40살 이라니. 물론 100% 복싱 때문은 아니겠지만, 운동을 더욱 끊을 수 없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관장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꿋꿋하게 견뎌내고 올해 3월, 드디어 첫 스파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좀 지나면 어렵지 않게 링에 올랐지만 저는 많이 느렸습니다. 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스파링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두근두근. 두려움인지 설렘인지를 안고 링에 올랐습니다. 막상 올라보니 알겠더군요. 복싱의 꽃은 역시 스파링이었습니다. 배운 동작들을 상대에게 써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보다 강렬했던 건 끝까지 버티는 경험이었습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데 종이 울릴 때까지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첫 스파링은 3분씩 두 번 했습니다. 이 6분을 쓰러지지 않고 링에서 버티고 나니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어? 나 아직 할 만한데.'


스파링을 시작한 뒤에는 복싱장 사람들과도 좀 더 가까워졌습니다. 같이 주먹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나도 이제 '하나가 됐다'라는 기분도 들고, 신기하게도 서로 때리고 맞은 사람들이 더 친해집니다. 중요한 건 맞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복싱장에서의 유대감은 스파링으로 다져지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복싱장에 다니면서 서너 번쯤 스파링을 했을까요. 오른팔이 살짝 저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운동을 과격하게 해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도록 저림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병원에 갔고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습니다. 망연자실했습니다.


'이제 복싱 못 하는 건가.'


관장님께 말씀드리고 레슨과 샌드백 치기, 스파링을 모두 멈췄습니다.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러닝머신을 걷고 사이클도 가볍게 탔습니다. 목디스크에 좋다는 신전운동을 반복하고, 가볍게 섀도복싱만 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 반을 보냈습니다. 샌드백을 마음껏 때리지도 링에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저보다 늦게 복싱장에 온 사람들 실력이 늘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스파링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부러웠습니다. 매일 똑같이 복싱장에 나오는데 어쩐지 혼자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스파링은 단순히 실력을 가르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가 나이고, 건강이 먼저니까요. 평소 자세를 신경 쓰고, 꾸준히 치료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팔 저림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컨디션 좋은 날에는 샌드백도 신나게 다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이 물었습니다.


"다시 스파링 할 수 있겠어요?"


'다시 맞으러 링에 올라갈래요?'라는 의미인데, 이 말이 참 설렜습니다. 오랜만에 올라간 링은 더 힘들었습니다. 3개월 넘게 가벼운 운동만 했던 터라 체력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은 넘어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종이 울리고 링에서 내려오는데 뿌듯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다시 복싱장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복싱장에는 다양한 사람이 다닙니다. 10대부터 50대까지의 남자들이 모여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두드리고, 땀을 흘립니다. 그러다 링 위에서 주먹을 주고받고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스파링을 하고 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실력과 체력에 대한 재정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관원들이 복싱 연습을 조금 지겨워할 때쯤 전략적으로 스파링을 권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력을 체크하고, 부족한 부분은 더 연습하고, 체력을 더더욱 단련하라는 의미겠죠.


목디스크 진단을 받고도 제가 복싱장을 그만두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싱장에 가면 운동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유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50대가 되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보고, 누군가와 주먹을 맞대는 순간을 기다리고, 다음 스파링을 생각하며 다시 체력을 키우는 생활. 무료한 중년의 인생에 활력이 되고 있습니다. 재미와 설렘, 자신감과 더불어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복싱장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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