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는 어떻게 나라를 먹여 살렸나

by배대웅

가난한 사람에게 장기투자를 권하기는 어렵다. 당장 다음 달 카드값도 걱정인데 “20년 뒤를 보고 투자하세요”라고 하면 욕먹기 딱 좋다. 국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없으면 당장 필요한 곳부터 메워야 한다.


그런데 1950년대 한국은 반대로 했다.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세계 최첨단 기술이던 원자력을 배우겠다고 미국에 유학생부터 보냈다. 당장 쓸 전기도 부족한 나라가 20년 뒤의 발전소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선택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컬러방송도 없는데 컬러 TV를 개발했고, 철강 수요도 얼마 되지 않는데 거대한 제철소부터 구상했다. 외국에서 기술을 안 팔면 연구소에서 직접 만들었다.


지금 결과를 알고 보면 선견지명이다. 당시에는 도박에 가까운 베팅이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5시, 북한이 남한으로 보내던 전기를 끊었다. 공장에서는 기계가 멈췄고 수도 펌프가 서면서 물이 끊겼다. 병원은 비상 발전기에 의존했고, 염전에서는 바닷물을 끌어올리지 못해 소금 생산까지 차질을 빚었다. 해가 지면 전등도 켤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양초를 사려고 상점으로 몰려갔다.


남한이 쓰던 전기의 약 60퍼센트를 38선 북쪽에서 받아오던 탓이다. 일제가 압록강과 두만강 쪽에 대규모 수력발전소를 지어놓았고, 해방 뒤 그것들은 북한 소유가 되었다. 나라를 세웠지만 전기 스위치는 다른 나라가 쥐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번에 꺼버렸다.


단전 한 달 전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동했다. 돌아온 두 사람은 북한이 전력 공급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며 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열흘도 지나지 않아 전기가 끊겼다. 나라의 독립은 국경선을 긋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전기와 그것을 만드는 기술까지 자기 손에 있어야 했다.


당장 급한 전력은 발전소를 짓고 기존 시설을 복구하면서 메웠다. 하지만 공장이 늘어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전기가 필요할 터였다. 한국은 더 먼 미래에도 투자를 결정했다.


바로 원자력이었다. 지금이야 흔한 발전원이지만 1950년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원자력은 미국이 맨해튼 계획에 막대한 돈과 과학자를 쏟아부어 확보했고, 소련이 뒤쫓으며 체제 경쟁을 벌이던 최첨단 기술이었다. 1인당 GDP 60달러 수준의 한국에는 애초에 자기 차례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냉전이 뜻밖의 기회를 줬다. 1953년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선언했다. 소련과 핵무기로 경쟁하는 동시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우방국에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55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고 젊은 과학자들을 유학 보냈다. 4년 동안 150여 명이었다. 국내에 시설과 인프라가 없었으니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지식뿐이었다. 1959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는 연구용 원자로를 들여왔고, 원자로 물리, 방사선, 핵연료 같은 기술을 하나씩 익혔다. 발전소를 짓기 전에 원자력을 다룰 사람과 기술부터 쌓은 것이다.


이승만에게 원자력 도입을 조언했던 미국의 전력 전문가 워커 시슬러는 결실을 보려면 20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거의 그대로 됐다. 1978년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1972년부터 2002년까지 국내 전력 소비는 28배로 늘었다. 2002년에는 원자력이 전체 발전량의 약 40퍼센트를 바카라임졌다. 우리나라가 성장하면서 제철소를 돌리고 자동차와 배를 찍어내는 동안 원전도 함께 늘어났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 흐름은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에서 사람을 키웠고, 박정희 정부에서 고리 1호기를 지었다. 이후에는 원전을 늘리는 동시에 외국 기술을 국산화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도 핵연료와 원자로 기술을 축적하며 한국형 원전 개발의 한 축을 맡았다. 1997년 첫 수평적 정권교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야당 시절 원자력에 비판적이었던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 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적어 원자력 개발이 불가피하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원자력 개발은 한 정권의 작품이 아니었다. 냉전이 문을 열었고, 이승만 정부가 사람부터 집어넣었다. 다음 정부들은 그 사람들이 계속 연구할 시간을 줬다. 그 시간이 쌓여 연구소가 되고, 발전소가 되고, 기술이 됐다. 20년 걸린다던 일을 정말 20년 넘게 반복했다.


그렇게 만든 전기는 산업화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산업화가 시작되자 전기는 먹어도 먹어도 모자랐다. 제철소가 쇳물을 뽑고, 조선소가 배를 만들고, 석유화학 공장이 밤낮없이 돌아갈수록 더 많은 전기가 필요했다. 원전은 그 수요를 떠받치는 주요 발전원이 됐다.


처음에는 미국에 사람을 보내 원자력부터 배워와야 했다. 몇십 년 뒤에는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을 돌릴 원전을 직접 짓고, 나중에는 그 기술을 다른 나라에 팔았다. 가난한 나라가 20년을 내다보고 던진 베팅치고는 꽤 크게 돌아온 셈이다.




전기만 있다고 산업화가 되는 건 아니다. 공장에 전기를 넣었으면 이제 뭘 만들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만들어졌다. 초대 소장 최형섭은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다니며 귀국을 권했다. 가난한 조국을 위한다는 애국심에만 호소한 것은 아니었다. 국립대 교수보다 몇 배 많은 월급을 줬고, 대통령보다 많이 받는 연구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받던 연봉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연구 환경은 비교하기조차 민망했다. 연구할 곳도, 함께 일할 기업도 앞으로 하나씩 만들어야 했다.


최형섭은 그런 사람들에게 멋진 연구를 해보자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는 못 한다.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필요 없다.” 낭만이라고는 1그램도 없는 연구소였다.


대신 정말 먹고사는 데 필요한 건 닥치는 대로 했다. 1971년에는 컬러 TV 수상기를 개발했다. 대한민국에서 컬러방송이 시작된 것은 1980년이다. 볼 방송도 없는데 TV부터 만든 것이다. 국내 기업들은 외국 부품을 가져와 TV를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KIST는 집적회로를 이용한 컬러 TV를 만들고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에 기술을 넘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TV는 미국에 수출됐다.


KIST의 연구 대상에는 산업 그 자체도 있었다. 1969년 정부는 KIST에 기계공업 육성 방안을 의뢰했다. 연구진은 어떤 공장이 필요하고, 얼마나 크게 지어야 하며, 어떤 기술을 들여와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여기서 포항제철과 현대조선소 같은 사업들의 밑그림이 나왔다.


포항제철은 규모부터 논란이었다. 당시 세계은행은 한국의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연산 50만 톤도 많다고 봤다. KIST의 계산은 두 배가 넘는 103만 톤이었다. 지금 철을 얼마나 쓰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조선·기계·건설이 성장하면 얼마나 필요할지를 계산한 결과였다. 그 정교한 논리가 실제로 먹혔다. 1973년 포항제철 1기는 정말 연산 103만 톤 규모로 준공됐다.


조선업도 비슷했다. 한국은 대형 선박을 만들어본 경험이 사실상 없었다. 먼저 KIST가 대형 조선소 건설을 제안하고 해외 기술협력, 선박 설계 도입, 적정 규모를 구체화했다. 현대가 울산에 조선소를 짓는 동안 KIST에서는 그 조선소를 굴리는 데 필요한 기술의 구조를 설계했다. 그리고 1974년 울산에서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이 나왔다.


제철소도 조선소도 KIST가 지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크게 지을지, 무슨 기술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지를 연구했다. 지금 같으면 대기업 전략기획실이나 대형 컨설팅 회사가 할 법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공장이 없으니 어떤 공장을 지어야 할지부터 연구해야 했다. 산업화 초창기에는 산업을 설계하는 것까지 연구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맨날 나라의 산업지도만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업이 당장 필요한 기술을 구하지 못하면 그것도 KIST로 왔다. 스케일이 제철소에서 필름 한 장까지 널뛰었다.


1970년대 중반 선경화학이 KIST를 찾아왔다. 만들고 싶은 것은 폴리에스터 필름이었다. 포장재와 전기 절연재에도 쓰였지만 비디오테이프의 핵심 소재이기도 했다. 사실 지금은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주워도 난감하다. 내용물이 궁금해지기 전에 당근에서 비디오 데크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필름을 만드는 것 자체가 첨단기술이었다.


선진국 기업들은 돈을 준다고 제조공정 전체를 넘겨주지 않았다. 산업화 시절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다. 사고 싶은데 안 판다. 그러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KIST는 핵심 소재인 폴리에스터 필름 칩에 집중해 1977년 개발에 성공했고, 선경화학은 이듬해 양산에 들어갔다.


선경이라는 이름이 낯설다면 SK를 떠올리면 된다. 요즘 SK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아마 SK하이닉스일 것이다. 삼성전자와 함께 ‘삼전닉스’로 묶이고, AI 열풍과 함께 HBM으로 더 유명해진 바로 그 회사다.


그런데 그룹의 역사를 반세기쯤 거슬러 올라가면 비디오테이프가 나온다. 선경은 KIST에서 폴리에스터 기술을 받아 사업을 키웠고, 비디오테이프용 필름은 화학·소재 부문의 성장 동력이 됐다. 지금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지만, SK의 성장사를 뒤로 돌려보면 KIST 연구실에서 만든 폴리에스터가 등장한다.


더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KIST에서 기술을 받아가던 선경은 훗날 KIST에 발전기금을 내놓았다. 계약에 있던 돈도, 갚아야 할 빚도 아니었다. 잘 먹고 잘살게 된 뒤 옛날에 도움받았던 연구소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가 세운 연구소에서 기술이 나왔고, 그 기술을 받아간 기업이 성장했다. 기업은 훗날 연구소에 다시 돈을 보탰다. 연구소와 기업이 서로의 덩치를 키웠다. 산업화 시절 한국에서 꽤 근사하게 작동했던 선순환이었다.


물론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웬만한 연구소보다 훨씬 많은 연구비와 인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다. 기술 하나를 구하지 못해 국바카라연구소 문부터 두드리던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기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커지는 사이, 기술은 훨씬 더 무서운 속도로 앞서갔다. AI에는 천문학적인 돈과 전력, 반도체가 들어간다. 양자컴퓨팅과 유전자치료제처럼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기술에는 긴 시간까지 필요하다. 성공하면 판을 바꾸지만 실패하면 수년간의 투자가 날아간다. 기업 혼자 베팅하기 부담스러운 영역은 여전히 많다.


그래서 반세기 전 KIST와 선경의 이야기는 옛날 성공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기술도 기업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혼자 하기 어려운 연구를 함께 떠받치고 그 성과가 다시 다음 연구로 이어지는 구조는 여전히 쓸모가 있다.


1970년대 KIST는 컬러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컬러 TV를 만들었고, 존재하지도 않던 대형 조선소를 설계했으며, 기업이 구하지 못한 폴리에스터 기술을 개발했다.


AI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돈이 될 거라고 확인된 뒤에는 이미 늦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기술을 선점해서 버텨야 한다. 연구소는 그 위험을 먼저 떠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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