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장례식을 치르며 발전한다

플랑크, 아인슈타인, 그리고 세대교체의 과학

by배대웅

사람 마음이 생각보다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치판에서 배웠다. 오래전 한 정당에서 활동하면서 선거 때마다 참 열심히 뛰었다. 전단지도 돌리고, 없는 살림에 특별 당비도 내고, 거리에서 정바카라도 설명했다. 다만 지지율은 보통 3%, 잘해야 5% 정도 나왔다. 제도권에서 가장 왼쪽에 있던 당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선거방송 자막으로만 보면 그 존재는 확인되었다. 하지만 집권까지는 로또 5등 당첨자가 인생 역전을 꿈꾸는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다.


가장 어려운 상대는 노년층이었다. 복지와 노동을 이야기하면 “이런 빨갱이들!”이 돌아왔고,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한으로 가라!”라는 말이 따라왔다. 정바카라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네가 말하는 건 들을 필요도 없다는 판단이 이미 끝나 있었다. 그 앞에서는 통계도, 논리도, 외국 사례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우리끼리 자조하듯 이런 말을 했다. “저 양반들은 설득이 안 된다. 시간이 한참 더 지나야 한다. 저 세대가 다 죽어야 우리가 집권하는 세상이 온다.”


말은 험했으나 당시에는 진지한 체념이었다. 나이가 들어 굳어진 세계관은 정바카라 자료집 몇 장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우리가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배워온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이미 있었다. 정치인이나 슬롯학자가 아니었다.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였다. 양자역학의 문을 연 사람, 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자들이 결국 세상을 떠나고, 처음부터 그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면서 비로소 승리한다."


훗날 이 말은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에 의해 "과학은 한 번의 장례식마다 발전한다"로 압축되며 더 유명해졌다. 따지고 보면 무시무시한 문장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말을 한 사람이 과학의 문외한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평생 자연의 질서를 찾아 헤맨 물리학자가 자기 세계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과학은 논리와 실험의 세계다. 틀린 이론은 반박되고, 맞는 이론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대개 그렇게 배운다.


하지만 플랑크는 단언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고.

플랑크의 이 한 문장은 과학철학의 고전이 되었다. 새로운 진리는 실험실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교체와 함께 비로소 학문의 상식이 된다는 통찰이다.


물리학 제국의 균열


19세기말의 물리학은 잘 나가던 제국이었다. 뉴턴 역학은 행성에서 사과까지 같은 법칙으로 설명했고, 맥스웰 전자기학은 빛과 전기와 자기를 하나의 언어로 묶었다. 열역학은 증기기관의 시대를 통과하며 자연의 기본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 마치 거대한 제국이 천하통일을 이루며 국경선을 모두 확정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몇 개 있었다. 그러나 제국을 무너뜨릴 반란군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변방의 소요 정도로 보였다. 좀 더 정교한 계산과 더 좋은 실험 장비가 있으면 곧 정리될 문제로 여겨졌다.


그 변방의 소요 가운데 하나가 흑체복사였다. 이름은 어렵지만 현상은 익숙하다. 쇠붙이를 달구면 처음에는 붉게 달아오른다. 더 뜨거워지면 노랗게 빛난다. 더 올라가면 희고 푸른빛으로 변한다. 뜨거운 물체가 온도 변화에 따라 어떤 빛을 내는가, 이것이 흑체복사의 문제였다.


말로 하면 단순하지만 계산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전물리학의 방식으로 계산하면 짧은 파장, 그러니까 자외선 쪽에서 에너지가 무한대로 치솟는 황당한 결과가 나왔다. 현실의 쇠붙이는 그렇지 않다. 난로는 방을 데우지 우주를 폭발시키지 않는다. 계산은 제국의 법전대로 했는데, 자연은 전혀 다른 판결문을 들고 나온 셈이다.


플랑크는 이 문제를 오래 연구했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 찬 혁명가가 아니었다. 기존 물리학의 질서를 누구보다 존중한 보수적인 학자였다. 그런데 계산이 계속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1900년 12월 14일, 플랑크는 베를린 물리학회에서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가정을 발표했다. "에너지는 물 흐르듯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덩어리 단위로 주고받아진다" 이렇게 가정하면 흑체복사 문제가 풀렸다. 에너지의 최소 묶음, 훗날 사람들이 ‘양자’라고 부르게 된 그것이다.

왼쪽은 달궈진 금속, 오른쪽은 흑체복사 스펙트럼이다. 고전물리학은 이 곡선을 설명하지 못했고, 플랑크는 '양자'라는 새로운 가정을 도입했다.


플랑크 본인도 이 가정의 폭발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계산을 맞추려고 마지못해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뒤에 전혀 다른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혁명의 시작치고는 꽤 난감한 장면이다. 프랑스혁명처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도 아니고, 러시아혁명처럼 겨울궁전을 점령한 것도 아니었다. 한 물리학자가 칠판 앞에서 수식을 고치다 제국의 지반을 건드린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곧장 환영받지 못했다. 플랑크의 공식은 잘 맞았다. 문제는 공식이 맞는다는 사실과 세계관을 바꾸는 일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틀린 계산을 붙들고 고집을 부리는 진상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오랫동안 몸에 밴 사고방식이 있었다. 자연은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모든 결과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충분한 정보만 있다면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양자론은 그 믿음 하나하나에 심각한 균열을 냈다. 에너지는 끊어져 있다.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태양계의 행성처럼 얌전히 도는 것이 아니다. 측정하기 전에는 무엇이 확정되어 있는지조차 말하기 어렵다.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자연을 기술하는 문법 자체가 바뀌는 일이었다.


젊은 세대의 반란


이후 양자론은 빠르게 자라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닐스 보어의 원자모형,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걸 교과서에서는 설명 몇 줄로 끝내지만, 실제 현장은 훨씬 소란스러웠다. 그만큼 양자역학은 개선문을 통과하며 화려하게 입성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회의장, 편지, 논문, 강연, 밤샘 토론을 거치며 조금씩 자리를 빼앗았다. 새로운 세대가 기존 물리학의 왕좌 앞에서 쿠데타를 벌인 셈이다.


그 선봉에 닐스 보어가 있었다. 그가 이끈 코펜하겐의 이론물리연구소는 양자역학이라는 쿠데타의 작전본부였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폴 디랙 같은 젊은 천재들이 그곳에 포진했다. 그들은 원자 세계를 설명하려면 낡은 틀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자가 정확히 어디 있는가. 측정 전에도 그 성질이 정해져 있는가.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쯤 되면 기성세대가 화를 낼 만하다. 수백 년간 쌓아온 물리학의 권위에 맞서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당신들의 이론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대들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귀족들이 보기에 이것은 예의범절의 붕괴였다.


가장 유명한 반대자가 아인슈타인이었다. 다만 주의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모르는 완고한 꼰대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양자론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05년 그의 광양자 가설이 없었다면 양자론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최종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자연이 근본적으로 확률에 의해 움직인다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온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 철학적 반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바란 것은 더 깊은 질서였다. 양자역학이 실험값을 잘 맞힌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최종 언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 더 완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변수가 있을지언정, 자연 자체가 고작 확률에 의해 지배될 리는 없다는 것이다.


보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맹공을 하나씩 받아쳤다. “하지만 신이 어떻게 세계를 다스릴지 정해주는 것도 우리의 과제는 아니다.” 그런 그의 곁에서는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랙 같은 젊은 신성들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양자역학을 함께 만든 아인슈타인과 보어. 그러나 자연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인가를 두고는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양자역학의 혁명은 서로 다른 세계관의 충돌이기도 했다


이 대립은 세대 갈등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랬다.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생, 파울리는 1900년생, 디랙은 1902년생으로 당시 모두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20세기에 태어난 그들은 고전물리학의 궁전에서 오래 살아본 적이 없어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반면 19세기 사람인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은 그 궁전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고전물리학은 평생 공들여 지켜온 장엄한 문명이었다.


물론 생물학적 나이만으로 나눌 수는 없다. 보어의 해석에 비판적이었던 슈뢰딩거는 보어보다 두 살 어렸다. 양자론의 문을 연 플랑크는 말년에 들어서는 엄격한 인과성을 옹호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의 창시자 중 하나였지만 코펜하겐 학파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주민등록상의 세대가 아니라 학문적 세대다. 어떤 언어로 자연을 처음 배웠는가의 차이다.


물리학의 정권교체


훗날 토머스 쿤은 이 흐름을 과학철학으로 정식화했다. 1962년 출간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그는 과학이 교과서처럼 차곡차곡 발전한다는 통념을 뒤흔들었다.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이 과학을 바꾼다는 설명이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은 그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무엇을 중요한 문제로 보고, 어떤 설명을 좋은 설명으로 받아들이는지를 결정하는 사고의 틀이다. 정상과학의 시대에는 모두 그 틀 안에서 퍼즐을 푼다. 그러다 퍼즐이 계속 맞지 않으면, 즉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면 누군가 묻는다. "혹시 퍼즐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쿤이 과학혁명을 정치혁명에 비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혁명기의 사람들은 같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미래를 본다. 한쪽은 기존 제도를 수리하면 된다고 믿는다. 다른 한쪽은 판 자체를 완전히 새로 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은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의 정권교체였다. 물론 뉴턴과 맥스웰이 세운 고전물리학의 질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동차, 다리, 포탄의 많은 계산은 고전물리학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자연의 가장 깊은 층위를 설명하는 권력은 극적으로 이동했다. 원자와 전자와 빛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다. 그 헌법의 이름이 양자역학이었다.


플랑크의 말은 그래서 잔인하면서도 정확하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를 하나하나 설득해서 승리하지 않는다. 반대자들이 사라지고, 처음부터 그 진리에 익숙한 세대가 연구실과 학술지를 채울 때 비로소 일상이 된다.


물론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이 모두 장례식만 기다린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과학사에는 중간에 생각을 바꾼 사람도 많다. 젊은 시절에는 저항하다가 나중에 새 이론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 또 낡은 세대가 늘 틀리고 젊은 세대가 늘 맞는 것도 아니다. 젊은 헛소리도 많고, 노련한 회의주의가 학문을 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플랑크의 말이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과학은 논문만으로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제도, 명성, 연구비, 학회, 네트워크가 함께 움직인다. 어떤 대가가 한 분야의 문지기 역할을 하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목소리가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 연구 주제의 유행도 권위자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 젊은 연구자는 논문 심사를 통과해야 하고, 자리를 얻어야 하며, 연구비를 받아야 한다. 자연을 상대하기 전에 사람을 통과해야 한다.


최근에는 플랑크의 말을 실제 데이터로 검토한 연구도 나왔다. 저명한 생명과학자들이 세상을 떠난 뒤 해당 분야의 논문 흐름을 분석했더니, 그들의 파트너가 아닌 외부 연구자들의 진입이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물론 이것이 장례식이 곧바로 새로운 진리를 만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권위자의 존재가 연구의 병목처럼 기능하거나, 다음 세대의 진입을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

새 이론은 혼자 탄생하지 않는다. 양자역학도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같은 연구 공동체의 토론 속에서 다듬어졌다. 과학은 아이디어뿐 아니라 사람들의 네트워크로도 움직인다.


마지막 심판자


그 옛날의 선거 유세를 다시 떠올려본다. 우리는 정바카라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더 정확한 자료와 더 현실적인 공약이면 사람들의 생각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자주 바뀌지는 않았다. 사람은 자기 삶 전체로 형성된 세계관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과학자도 다르지 않았다. 플랑크는 흑체복사 앞에서 고전물리학의 틈을 보았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그 틈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그 세계의 철학적 대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 하나 헛짓을 하지 않았다. 모두 천재였고, 모두 진지하게 자연을 이해하려 했다.


이 점에서 과학은 정치와 닮았다. 사람은 사실을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이 배운 언어와 살아온 시대를 통해서 본다. 정치에서 그것을 이념이라 부른다면,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새 이론은 진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란이다. 어떤 사람에게 새 정당은 희망찬 미래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라가 망할 징조다.


그러나 정치와 과학에는 결정적 차이도 있다. 정치에서는 마지막 심판자가 사람이다. 설득이든 동원이든, 결국 사람의 숫자가 최종 판을 결정한다. 반면 과학에는 자연이라는 까다로운 심판자가 남아 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싫어해도 실험값이 계속 같은 방향을 가리키면 언젠가는 움직여야 한다. 권위자가 버텨도 반도체가 작동하고, 레이저가 빛을 내고, MRI가 몸속을 보여주면 이론은 교과서에 들어간다.


양자역학이 바로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것은 철학적 취향이 아니라 자연의 설명에 성공했기 때문에 승자가 되었다. 오늘날 스마트폰, 반도체, 레이저, 양자컴퓨터의 기초에는 모두 양자역학이 있다. 신이 주사위를 던지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해석의 문제로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사위의 통계는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다.


플랑크의 문장은 언뜻 냉소처럼 들린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에 대한 신뢰도 느껴진다. 사람은 안 바뀐다. 그래도 과학은 간다. 느리게, 시끄럽게, 때로는 장례식을 거치면서. 그 사실을 이해하면 양자역학의 역사는 난해한 수식의 연대기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낡은 체제가 쉽게 퇴장하지 않는다는 인간적인 이야기다. 동시에 새 체제가 끝내 자리를 잡는 방식에 대한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과학의 진보는 개선군의 행진보다는 긴 장례 행렬에 더 가깝다. 다만 그곳에는 다른 장례식에서는 볼 수 없는 조문객이 한 명 있다. 바로 자연이다. 사람들은 끝까지 논쟁을 벌일 수 있고, 권위자는 마지막까지 변화를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실험이 맞으면 살아남고, 틀리면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과학은 정치와 닮았지만 끝내 정치가 아니다. 과학에서 마지막 조사(弔詞)를 읽는 것은 언제나 자연이다.

모든 논쟁이 끝난 뒤에도 마지막 판단은 자연이 내린다. 그것이 과학이 정치와 끝내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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