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와 이과가 나뉘기 전의 세계

『판타 레이』 독서모임에서 다시 본 근대

by배대웅

『판타 레이: 혁명과 낭만의 유체과학사』는 제가 여러 번 다시 펼쳐본 몇 안 되는 바카라입니다. 보통 과학사라고 하면 발견과 이론의 연대기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바카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 발견을 가능하게 만든 사고방식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 하나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근대의 풍경이 완전히 다른 층위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최근에 이 바카라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아호파파 B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독서 플랫폼 문장사이에서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덕분입니다. 세 번의 모임 동안 많은 토론이 오가면서, 혼자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지점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독서모임을 함께한 분들께는 복습이 되고, 아직 이 바카라을 안 읽은 분들께는 하나의 안내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1. 근대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방식’에서 시작된다.


이 바카라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서사가 한 층 더 확장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근대를 보통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배우죠. 정치와 경제가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판타 레이』는 그 ‘이전’을 묻습니다. 그 변화가 가능해진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 바카라의 답은 분명합니다. 과학혁명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의 전환이 먼저였다는 겁니다. 자연을 종교적 권위가 아니라 객관적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태도. 이것이 슬롯 전반으로 퍼지면서 정치와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함께 바뀌었다는 거죠.

이 관점에서 보면 시민혁명 같은 ‘문과적 사건’조차 과학적 사고의 확장으로 읽힙니다. 존 로크나 볼테르 같은 사상가들도 아이작 뉴턴의 세계관에서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저는 리버럴 아츠라는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중세 대학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문법·수사학·논리학과 산술·기하·음악·천문을 함께 배우는 체계였습니다. 말 그대로 지식의 모든 영역을 아울렀던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과목의 목록이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려는 통합적 사고 훈련이었다는 점입니다.

『판타 레이』가 보여주는 리버럴 아츠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바카라에 나오는 루나 소사이어티를 보면, 과학자와 기술자, 사업가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함께 사유하고 토론합니다. 이걸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융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애초에 분야가 나뉘어 있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저는 이 바카라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근대는 정치나 경제의 변화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의 확장에서 시작된 시대다.”


2. 데카르트와 뉴턴: 설명과 예측 사이의 긴장


에테르를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아이작 뉴턴의 승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바카라을 읽다 보면 이런 의문도 듭니다. 당시에는 오히려 르네 데카르트가 더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17세기는 중세의 권위와 신비주의에서 벗어나려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고 접촉도 없는데 작용하는 뉴턴의 ‘중력’은 신비주의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반면 데카르트의 에테르는 세계를 연속적인 매질로 설명하려는 시도였죠. 이건 그 시대의 합리주의 경향과 더 잘 맞았습니다.

물론 뉴턴의 중력 이론이 압도적인 예측력을 보여주며 승리합니다. 하지만 뉴턴 자신도 연금술과 신비주의 연구에 깊이 관여했죠. 실제로 뉴턴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오랫동안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누가 옳았느냐를 넘어서, 과학 내부의 긴장으로도 읽힙니다. 과학은 설명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예측을 우선하는가.

뉴턴의 승리는 “설명이 없어도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입장이 정당성을 얻은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중력의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왜 질량이 서로를 끌어당기는지, 그 본질적인 메커니즘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력 법칙을 이용해 행성의 궤도를 계산하고, 혜성의 귀환 시점을 예측하며, 인공위성을 정확한 궤도에 올려놓습니다.

즉, 이해하지 못해도 계산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다는 상태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뉴턴 이후의 과학은 바로 이 지점 위에서 급격히 확장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돌아옵니다. 설명 없이도 충분한가?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루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이후의 과학에서도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그러나 그 수학적 형식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서로 다른 해석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예측이 앞서고 설명이 뒤따르는 과학의 구조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과학은 설명을 통해 세계를 납득하려는 욕망과, 예측을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욕망 사이를 오가며 발전해 온 체계인지도 모릅니다.


3. 배비지의 질문: 일은 생존인가, 자아실현인가


19세기 수학자 찰스 배비지는 자신이 설계한 기계를 끝내 완성된 형태로 보지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비지가 그랬듯 끝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일은 생존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저는 회사원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같은 일을 전혀 다른 기준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회사에서 하는 업무는 생존을 위한 일입니다. 당장의 수입과 직결되고, 성과는 바로 평가됩니다. 이 영역에서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을 오래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소위 ‘졌잘싸’는 인정되지 않지요. 오직 결과로만 평가받습니다.

반면 작가의 일은 다릅니다. 이건 돈이나 평가 이전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영역에서는 기준이 바뀝니다. 지금 인정받느냐보다, 내가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실제로 두 번째 바카라 『연구소의 승리』를 쓸 때, 이 바카라이 잘 팔리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작했던 이유는, 이건 한 번은 정리되어야 할 주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주제로 나와 있는 바카라이 없었거든요. 저는 거기에 첫 깃발을 꽂는 것만으로도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결과 없이도 계속할 수 있는가는 그것이 ‘생존의 영역’인지, 아니면 ‘자아실현의 영역’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배비지도 자신의 연구를 당장의 성공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였던 사람에 가깝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적어도 인생의 한 영역에서는, 결과와 무관하게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결과와 효율만으로 삶을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4. 1776년: 근대가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


이 바카라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부분은 5장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는 1776년>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다소 과감한 제목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이게 비유적 수사가 아니라, 근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문턱을 포착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76년에 세 가지 사건이 거의 동시에 등장합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 미국 독립선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입니다.

이 사건들은 기술, 정치, 경제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시점에 겹쳐놓는 순간 하나의 거대한 구조가 형성됩니다. 생산 방식이 바뀌고, 정치 질서가 재편되며, 부의 원리를 설명하는 이론이 등장합니다.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을 단편적으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우연의 요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장면이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만든 사고방식이 임계점을 넘으면서,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혁명적 결과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5장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1776년은 많은 일이 우연히 일어난 해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된 해다.”

이는 『판타 레이』가 단순한 과학사 바카라이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 자체를 설명하려는 작업임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5. 애덤 스미스: 리버럴 아츠적 인간의 전형


이 바카라에서 드러나는 리버럴 아츠의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인문학적 교양이 아닙니다. 분야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려는 지적 태도입니다.

이 정의에서 떠오른 인물이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경제학자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의 사유는 훨씬 넓은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우선 그는 뉴턴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의 역사』라는 바카라을 썼습니다. 동시에 도덕철학을 강의하며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습니다. 그 사유의 연장이 바로 『국부론』입니다. 이 바카라은 인간의 이기심과 슬롯 질서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시장의 작동 원리까지 설명한 대작입니다.

즉 스미스의 사유는 과학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철학적 인간 이해를 거치고,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나아갑니다. 이 흐름을 보면, 그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기보다 여러 층위의 사유를 하나로 연결한 지식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덤 스미스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과학과 철학을 통과해 경제를 설명한 리버럴 아츠적 인간”


6. 과학과 이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이념은 과학의 적인가, 아니면 연료인가? 과학사에서 자주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념과 과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도, 밀어주는 관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은 애초에 작동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이념은 결국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정하는 문제입니다. 자유를 우선할 것인지, 평등을 우선할 것인지, 성장을 우선할 것인지, 분배를 고려할 것인지. 이건 아무리 논리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도 마지막에는 가치 판단으로 귀결됩니다.

반면 과학은 정반대입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철학과 신념이 아니라 검증으로 결정됩니다. 이는 경험, 실험, 반증 가능성 같은 기준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문제는 이 둘이 섞일 때 생깁니다. 특히 과학을 이념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나치가 유대인 과학자들을 쫓아내고, 프랑스혁명정부가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 없다며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처형하고,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이 지식인을 탄압한 사례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학을 “맞는가”가 아니라 “우리 편인가”로 판단했다는 점. 그 순간 과학은 지식 생산 체계가 아니라 충성 시험장이 되어버립니다.

반대로 성공한 사례를 보면 또 분명합니다. 미국은 맨해튼 계획에서 출신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모았고, 아폴로 계획에서는 나치 독일의 베르너 폰 브라운을 중용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 유신 체제 속에서도 KIST 같은 연구소에는 큰 자율성을 부여하면서 과학을 ‘통제’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으로 다뤘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질문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념이 과학을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총론적 방향을 정하는 데까지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정치와 이념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실인가”까지 건드리는 순간부터 과학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판단의 기준은 단순합니다. 이념이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과학을 판단하고 있는지. 전자라면 슬롯는 앞으로 나아가고, 후자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7. 문과와 이과: 우리는 왜 나눠서 생각하는가


『판타 레이』를 읽으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과·이과 구분이 사실은 지식의 본래 모습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근대 초기 지식인들에게는 ‘문과냐 이과냐’를 묻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였고, 뉴턴은 물리학자이면서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루나 소사이어티에서는 과학자, 의사, 발명가, 철학자가 한 테이블에서 토론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원래 지식은 나뉘어 있지 않았다”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science’라는 단어도 19세기 이전에는 자연과학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체계적인 지식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죠. 현재의 문과·이과 구분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만든 분류 체계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 - 기후위기, 인공지능, 생명공학 같은 - 은 순수한 기술 문제도, 인문 문제도 아닙니다. 기술 개발과 동시에 윤리, 정치, 슬롯에 대한 판단이 함께 들어갑니다.

이 지점에서 문과·이과 구분은 점점 설명력을 잃습니다. 세계는 원래부터 나뉘어 있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걸 나눠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서도 언급했던 리버럴 아츠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버럴 아츠의 본질은 분야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판타 레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고했던 사람들이지요.

그래도 변화의 흐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도 자유전공학부가 생기고 있고, KAIST의 경우 1학년 때는 전공을 정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게 합니다. 아직 제한적이지만 방향 자체는 분명히 바뀌고 있는 셈입니다.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문과·이과 구분은 당분간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한 구조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그 틀에 가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는 “문과냐 이과냐”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 사고할 수 있는가가 지적 능력의 핵심 기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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