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해야 하나, 놓아버려야 하나
8사람은 왜 과거를 돌아보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된 질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찾고, 후회를 반복하면서도 기억을 되새기며, 때로는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 오래전의 사건들을 끌어온다. 마치 과거 어딘가에 지금의 나를 해독할 열쇠가 숨겨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그 열쇠가 잠재의식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는 그림자라는 스스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또 하나의 자신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억눌린 욕망과 분노, 두려움과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살아남아 우리의 현재 선택과 관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개성화의 길이며, 밝음과 어둠이 통합된 '자기(Self)'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융의 사상은 설득력이 있다. 누구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반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 어느 날 불쑥 현재를 흔들고,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을 우리는 종종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질문도 떠오른다. 정말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해석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성경의 사도 바울이 떠오른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라고 말했다. 그의 관심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과거의 죄와 실패를 끝없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 이상 붙들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융과 정반대처럼 들린다. 한 사람은 무의식을 향해 내려가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를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 질문은 다시 불교가 제시하는 또 다른 방향을 불러온다. 생각도 내가 아니고, 감정도 내가 아니며, 몸도 내가 아니다. 심지어 기억조차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일 뿐이다. 나의 상처라고 부르는 것 역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인연의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분석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실체가 없는 '나'를 붙잡기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융의 개성화와 불교의 무아는 서로 마주 보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융은 그림자를 통합하여 참된 자기를 만나려 한다. 불교는 통합할 자기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옛 자기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입으라고 말한다.
세 사상은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인간을 어떤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그렇다면 차이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해석해 본다. 상자가 열리자 세상의 모든 고통이 쏟아져 나왔다. 그 신화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자신의 상자를 다시 열어야 하는가, 이미 지나간 아픔을 다시 꺼내 분석하는 일이 정말 지혜로운 일인가. 아니면 어떤 상자는 닫힌 채 두는 것이 더 나은가.
물론 상자를 닫아두었다고 해서 그 안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상자를 끝없이 열어보는 삶 또한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느냐, 잊느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대신 과거가 지금도 나를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만약 과거가 여전히 현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흔적일 뿐이라면,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집착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일까, 아니면 기억을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이 진정한 존재일까. 이 질문 앞에서 어느 한 철학을 선택하기 어렵다. 다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 있다. 자유는 과거를 모두 기억하는 데 있지 않고, 모두 잊는 데에도 있지 않다. 과거가 더 이상 현재를 대신 살아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자유란 오늘의 선택이 어제의 상처보다 더 큰 힘을 갖는 상태이다. 인간이 평생 걸어가는 길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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