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와 파동의 바다에서 태어난 가상현실,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인간
현대 과학에 따르면 우주의 가장 미시적인 단계에는 색깔도 냄새도 없는 입자와 파동의 무색무취한 바다만이 끊임없이 춤추고 있다.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이 황량하면서도 객관적인 우주의 모습 속에서 인간은 나무의 푸르름을 보고, 사과의 단맛을 느끼며, 집과 산이라는 입체적인 세계를 생생하게 인식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뇌가 구성한 일종의 가상현실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다채로운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무색무취한 바닷속에 '나무', '사과', '인간'으로 구분될 수 있는 물리적 패턴이나 클러스터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플랑크 시간과 같은 극미한 시간 규모에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일시적인 상태일지라도, 사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공간과 공기가 있다고 여겨지는 공간 사이에는 분명 물리적 밀도와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찰나의 차이가 하나의 물리적 등고선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이를 감각 정보로 번역하여 눈앞에 단단하고 새빨간 사과라는 순간적인 경험을 만들어 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영원히 고정된 입자나 파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느끼는 입체감과 실체감 역시 끊임없이 갱신되는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단지 이미 변한 사과 모습의 입자와 파동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과에 대한 기억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과의 모습은 이미 변하고 없지만, 인간의 기억이 3차원 입체감을 만들기 위해 유지하고 있다.
불교의 공(空) 사상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인식 자체를 다시 흔든다. 공 사상은 비록 찰나일지라도 입자와 파동의 특정 클러스터에 경계를 긋는 주체가 관찰자의 분별이라고 본다. 따라서 미시세계의 경계는 칼로 자르듯 명확한 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과 충돌하고 뒤섞이는 그라데이션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어디까지가 사과의 끝이고 어디서부터 공기의 시작인지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선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존과 편의를 위해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 그 흐름 위에 임의의 경계를 설정하고, "여기서부터 사과다"라고 이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나'라는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와 원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교체되고 있으며, 뇌의 시냅스 연결 또한 계속해서 변화한다. 1초 전의 나의 원 모습의 청사진인 몸의 입자와 파동은 이미 변했다. 따라서 1초 전의 나는 지금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경험한다. 그 이유는 뇌라는 고도의 예측 시스템이 1초 전의 기억과 10년 전의 기억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며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 곧 나라는 스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의 무색무취의 입자와 파동과 불교가 말하는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의 흐름이 매 찰나 생멸하며 만들어 내는 가상의 주인공이 바로 인간인 셈이다. 단지 인간은 기억과 스토리를 통해 고정된 모습이 일정 시간 존재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착각 속에 살아간다. 진짜 인간의 의미는 극미의 시간 속에서 변화 중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사색이 이끄는 결론은 하나이다. 우주에는 고정된 존재를 의미하는 명사(Noun)가 없다. 사과도, 나를 포함한 인간도,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독립된 실체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과는 1차적으로 원자의 입자와 파동이 춤을 추고, 2차적으로 그 춤이 만든 가상현실 속의 햇빛과 흙과 물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잠시 유지되는 '사과하고 있는(Appling)' 과정이다. 나 또한 매 순간 유입되는 우주의 정보를 통합하고 연결하며 '나다움(I-ing)'을 지속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세상을 잠시라도 존재하는 고정된 객체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우주의 본질은 멈춰 있는 명사가 아니라, 쉼 없이 흐르는 거대한 동사(Verb)이며 과정(Process)이다. 강물과 분리된 소용돌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사과 역시 우주의 흐름 속에서 잠시 피어나는 아름다운 파도일 뿐이다. 그리고 의식이란, 그 파도가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빚어낸 가장 경이로운 가상현실의 주체이다. 현대 물리학의 발견과 불교의 공 사상은 필자가 느끼는 '사물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사유에 비유와 관점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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