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된 환각

현실이란

by임풍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다. 길 옆에 서 있는 나무의 초록빛, 길가의 소음, 손끝에 닿는 선선한 바람까지, 우리는 뇌가 외부 세계를 완벽하게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일종의 고성능 비디오카메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뇌신경 과학이 밝혀낸 진실은 우리의 직관을 완전히 뒤흔든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외부 세계의 복사본이 아니라, 우리 뇌가 내부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과 비슷하다. 과거의 수동적 카메라 모델에서 현대의 능동적 예측 모델로 나아가는 이 놀라운 전환은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공간의 경계를 다시 보게 만든다.

[과거의 관점]
과거 학자들과 초기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을 상향식(Bottom-Up) 과정으로 설명했다. 빛이 눈의 망막을 자극하면, 그 전기 신호가 시각 피질로 전달되어 차례차례 분석되고, 최종적으로 뇌가 이를 조합해 나무라는 이미지를 완성한다는 관점이다. 뇌는 수동적으로 외부 자극을 받아들여 스크린에 투사하는 카메라이자 수신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관점은 치명적인 한계를 가진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신호는 본질적으로 극도로 불완전하고 노이즈가 심하며 모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망막에는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맹점이 존재한다. 만약 뇌가 순수하게 상향식 신호만 받아들여 현실을 구성했다면, 우리의 시야는 매 순간 흔들리고 끊기는 기괴한 모자이크 같았을 것이다. 또한 뇌에는 외부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시간으로 고화질 렌더링을 할 만한 대역폭이 없다.

[현재 뇌신경 과학의 관점, 예측하는 뇌]
현대 뇌신경학은 이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었다. 뇌는 외부 자극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장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 순간을 예측하는 능동적인 예측 기계(Predictive Brain)라고 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은 세 가지 기둥을 가지고 있다.
- 예측 부호화 (Predictive Processing): 뇌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내 눈앞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예측을 뇌의 상위 피질에서 하위 피질로 끊임없이 내려보낸다(하향식, Top-Down).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신호(상향식)는 이 예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검증하는 오차 신호(Prediction Error)의 역할만 할 뿐이다. 오차가 없다면 뇌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자신이 예측한 가설을 그대로 현실로 인식한다.
-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DMN, Default Mode Network): 우리가 특별한 외부 자극 없이 멍하게 있거나 명상할 때, 뇌에서 가장 활성화되는 거대한 신경망이다. DMN은 자아 성찰, 과거 회상, 미래 상상 등을 담당하며, 외부 자극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내부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자아를 유지하는 내부 모델의 핵심 엔진 역할을 한다.
- 내부 모델 (Internal Model): 뇌는 두개골이라는 어두컴컴한 뼈 감옥 안에 갇혀 있다. 빛도, 소리도 직접 닿지 않는다. 오직 뉴런의 전기적 흐름만 존재하는 이 어둠 속에서 뇌가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오랜 진화와 경험을 통해 축적한 우주의 물리 법칙과 슬롯적 규칙이 담긴 세계 시뮬레이터(내부 모델)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꿈과 상상, 오차 신호가 꺼진 내부 시뮬레이션]
이 예측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꿈과 낮의 상상력 역시 전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들은 예측 부호화 시스템이 아주 논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는 외부 감각 정보(오차 신호)가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뇌의 내부 모델을 실시간으로 교정(Tuning) 해 준다. 덕분에 우리의 예측이 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잠에 들거나 눈을 감고 깊은 상상에 빠지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의 채널이 차단되거나 극도로 약화된다. 이때 예측 기계인 뇌는 교정 장치(오차 신호)가 사라진 상태에서 내부 모델을 최대치로 가동하기 시작한다. 제약 장치가 풀린 뇌의 하향식 예측이 그 자체로 온전한 현실이 되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꿈이며 생생한 상상이다. 즉, 꿈은 현실 세계의 오차 수정 신호가 꺼진 상태에서 뇌가 홀로 가동하는 자유로운 시뮬레이션인 셈이다.

[뇌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
인간의 뇌는 물리적인 실제 자극을 받아들여 느낄 때와 단지 머릿속으로 그 순간을 생생하게 상상할 때 거의 동일한 신경학적 영역을 활성화한다. 레몬을 먹는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고, 무서운 생각을 하면 심박수가 치솟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뇌가 현실과 상상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차피 둘 다 내부 모델이 만들어낸 가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외부 자극에 의해 통제된 환각(Controlled Hallucination)이며, 꿈과 상상은 외부 자극에 의한 통제가 풀린 자유로운 환각(Uncontrolled Hallucination)이다."(신경학자 아닐 세스)

뇌의 입장에서는 외부 빛 자극을 통해 만들어낸 붉은 사과의 이미지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시각 피질을 자극해 만들어낸 붉은 사과의 이미지나 본질적인 신경학적 메커니즘이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현실은 감각 기관의 피드백을 통해 쉴 새 없이 오차가 보정되고 있다는 점뿐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능동적 우주]
이 과학적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깊은 철학적 자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영화를 단순히 감상하는 관객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기억, 감정 상태, 그리고 신념이라는 붓을 들어 도화지 위에 자신만의 현실을 그려나가는 능동적인 화가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뇌의 내부 모델은 온통 부정적인 정보만을 예측할 것이고 외부 세상에서 그 예측에 부합하는 단서들만 체리피킹하여 우리의 우울한 현실을 더욱 공고히 만들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해석권을 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예측 모델이다.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더 나은 예측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 과학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은 존재하는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임풍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인간 의식 탐구, 21세기 대응법, 몸과 맘 균형, 유튜브 채널: 아래 웹싸이트(URL) 클릭 연결, 저서: 21세기 인생 해석, 생각하면서 걸어가기,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났다

11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0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8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