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하나의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식하는 '나'는 비교적 고정되어 있고, 변화하는 것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에는 현실이 기쁨을 가져다주고, 어떤 날에는 슬픔을 가져다준다. 승진이라는 현실은 행복을 의미하고, 실직이라는 현실은 불행을 의미한다. 사랑은 좋은 현실이고 이별은 나쁜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는 현실 자체가 이미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을 담고 있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 전제를 의심해 왔다. 정말 변하는 것은 현실일까. 아니면 현실을 바라보는 의식의 위치일까.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판단이다"라고 이해했다.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자연의 질서일 뿐이며, 그 사건을 행복이나 불행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라고 보았다. 이들에게 현실은 본래 중립적이었다. 인간이 현실에 덧붙인 해석이 비로소 감정과 가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더 오래전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제한된 관점에서 드러난 그림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우리가 세계라고 믿는 것은 이미 우리의 위치와 조건에 의해 규정된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동굴 밖으로 나가 진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의식의 좌표를 바꾸는 것과 유사하다. 동굴 속의 그림자와 동굴 밖의 진짜 세계가 2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 우리의 의식의 좌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설명이다.
근대에 들어 이 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뒤집은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사물 자체(Ding an sich)'와 '현상(Phenomenon)'으로 구분했다. 사물 자체는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라는 인식의 형식을 거쳐 나타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실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구성한 현실을 경험한다. 칸트의 이러한 통찰은 철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린다. 이전까지는 인간의 인식이 세계를 따라간다고 생각했지만, 칸트는 오히려 인간의 인식 구조가 세계를 경험 가능한 형태로 조직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현실은 하나일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의식의 구조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이 문제를 더욱 깊게 탐구한 사람은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이다. 후설은 모든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는 지향성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의식은 빈 거울처럼 현실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존재가 아니다. 의식은 항상 특정한 방향에서 현실을 드러내고 의미를 형성하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후설의 사상을 발전시킨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의식을 몸과 분리된 정신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몸 자체가 세계를 경험하는 좌표라고 말한다. 같은 공간도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산은 하나이지만 정상에서 보는 산과 골짜기에서 보는 산은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든다는 관점이다.
하나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을 흔히 카메라처럼 생각한다. 현실이라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촬영하는 장치로 본다. 그러나 의식은 카메라보다 좌표와 유사하다. 촬영 각도나 위치라는 좌표가 이동하면 대상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진의 모습이 달라진다. 거대한 산이 있다. 동쪽에서는 일출이 보이고 서쪽에서는 노을이 보인다. 정상에서는 모든 능선이 연결되어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절벽만 보인다. 산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인 것은 관찰자의 위치뿐이다. 그러나 관찰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와 유사한 통찰은 동양 철학에서도 발견된다. 불교는 애초에 고정된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오온(五蘊)이 잠시 모인 과정일 뿐이며, 영원히 동일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모든 존재는 공(空) 하다고 설명한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존재도 독립적인 본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물의 의미는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따라서 현실이 본래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의식과 현실의 관계 속에서 행복과 불행이 생성된다. 이는 의식의 좌표 이동과는 다르지만, 세상을 전체 좌표들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식론을 이어받아 세계를 의지와 표상으로 설명했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객관적 현실 이전에 이미 표상된 세계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구성된 세계를 살아간다는 의미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끊임없이 결핍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라 욕망이 고통을 증폭시킨다고 보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라는 다소 급진적인 명제를 제시했다. 물론 이 말은 객관적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는 언제나 해석된 세계라는 점이다. 하나의 현실은 수없이 다양한 관점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20세기의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밖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세계 속에 던져져 있으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실은 객관적 대상이라기보다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만나는 장이다.
흥미롭게도 현대 인지과학은 이러한 철학적 직관을 실험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 이론에 따르면 뇌는 외부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를 예측하고 수정하는 기관이다. 또한 인지심리학의 인지적 재평가 연구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해석이 바뀌면 감정과 생리 반응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행동경제학의 프레이밍 효과는 같은 정보라도 어떤 틀 속에서 제시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질병은 실제로 존재하고, 전쟁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며, 가난은 인간의 삶을 제한한다. 철학이 말하는 것은 현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내는 세계는 언제나 의식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 현실과 걸러진 경험은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더 나은 현실을 얻기 위해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보다 의식의 좌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시선이나 관점이 바뀐다는 말과도 같다. 현실이 바뀌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의식의 위치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며, 현실이 그대로인데도 삶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의식의 좌표가 이동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란 현실을 원하는 대로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현실 안에서도 의식의 위치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일 수 있다. 현실은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경험하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세계는 의식이 현실과 맺는 관계만큼 존재한다. 사람이 성숙한다는 것은 더 좋은 현실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현실 속에서도 더 넓은 좌표 영역에서 세계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의식은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이 움직이는 순간,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세계는 완전히 새롭게 열린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록우주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선적인 시간은 없다. 모든 시공간이 이미 동시에 존재하며, 단지 우리의 의식이 시공간의 블록을 하나씩 이동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