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나를 결정하면 이 문장은 누가 썼는가?

by월하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0%도 없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하는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Sapolsky) 스탠퍼드대 교수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하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Determined)"를 소개하며, 뇌 세포 연구를 근거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파격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그의 주장을 들으며 그동안 내가 해온 수많은 행동과 선택들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듯하여 몹시 불쾌했습니다. 더 긁히는 포인트는 학계에서 조차 극단적이고 소수 의견으로 취급받는 그의 주장에 수긍하는 듯한 대중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마치 현대 신경과학이 '과학적 권위'를 이용해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철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결정론의 모든 주장이 허위는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저는 자유의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양립론'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결정론은 쉽게 말해 인간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굴러가는 정밀한 기계로 규정합니다. 우주의 모든 사건과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원인이 있으며,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의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라는 뜻입니다. 결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동의합니다. 이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DNA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 교육 수준 이 모든 것의 영향을 받아온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영향으로 하여금 지금의 취향, 소비패턴, 대인관계, 소득 수준뿐만 아니라 도덕성과 정치적 성향 하물며 내일 아침 먹을 메뉴 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근거가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뇌 실험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은 인간이 의식적인 선택을 내리는 순간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실험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피실험자들에게 시계를 바라보게 한 뒤,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자유롭게 손가락을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라고 의식적으로 마음먹은 정확한 순간과 손가락 근육이 움직인 순간, 그리고 뇌의 신경 신호가 활성화된 순간의 시간을 각각 측정했습니다. 상식적인 순서라면 당연히 피실험자의 의식적인 결심으로부터 뇌의 신호 호출, 손가락 움직임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내가 주인으로서 명령을 내리면 뇌와 몸이 복종하는 구조여야 하니까요. 하지만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피실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의식적으로 마음먹기 무려 약 0.5초 전에 이미 뇌의 운동 피질에서는 행동을 준비하는 신경 신호가 나타난 것입니다.



결정론자들은 이 실험을 결정적인 무기로 삼았습니다. 내가 내 의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믿었던 그 순간은 사실 착각이며, 의식이 인지하기도 전에 뇌라는 생물학적 기계가 이미 주체적으로 판단을 끝내놓았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의식은 행동을 결정하는 조종사가 아니라, 뇌가 이미 내린 결정을 뒤늦게 통보받는 승객에 불과하다는 서늘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이 실험을 설계한 본인조차 후속실험을 통해 뇌가 행동 신호를 보낸 후 실제 근육이 움직이기 전까지 약 0.2초의 찰나의 틈이 있었음을 밝혔습니다.



나아가 리벳의 실험이 나온 지 약 30년이 지난 뒤, 프랑스의 아론 슈르거(Aaron Schurger) 박사는 리벳의 해석을 완전히 뒤집는 혁신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리벳이 주장한 0.5초 전의 뇌 신호는 미리 내린 결정이 아니라, 단지 뇌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배경에서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내는 신경 소음이 무작위로 누적된 결과일 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즉, 0.5초 전의 전위는 행동의 결정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기 전 뇌가 엔진을 예열하며 치는 파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슈르거 박사는 이를 두고 "의식적인 결심이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을 꼭두각시라 부르던 결정론자들의 가장 단단한 기둥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애초에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단순한 행위가, 인간의 그 복잡하고 주체적인 의식적 자유의지를 모두 대변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또한 현대 철학의 거장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손가락을 움직여야지"라고 의식적으로 인지한 짧은 순간만을 자유의지의 시점으로 좁게 봐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사실 이에 앞서 원론적인 의문이 듭니다. 뇌의 반응을 나의 일부로 보지 않고 분리해서 보는 이원론적인 시각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결정론자들은 뇌와 자신을 하나로 보는 물리주의적 일원론자들입니다. 영혼이나 마음은 따로 없으며, 오직 물리적인 하드웨어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정신은 뇌 세포의 신호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리벳의 실험과 새폴스키의 주장은 뇌(물질)와 나(의식)를 별개의 존재로 나누어 놓는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평소 일원론을 주장하면서 정작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뇌와 나를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어법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뇌가 나보다 0.5초 먼저 결정했다"라는 말 자체가 뇌와 나를 분리하고 있으니까요. 뇌가 명령하면 나는 그 신호에 반응하는 생물학적 로봇에 불과하다는 결정론자들의 주장은 전제부터 어긋났습니다.



또한 새폴스키 교수의 가장 모순적인 지점은 신경가소성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는 뇌가 변한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뇌가 변하는 그 과정과 타이밍마저도 결국 과거의 유전자와 환경 자극에 의해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던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어떤 반증을 들이밀어도 "그것조차 뇌의 작용이자 결정된 것"이라는 문장으로 무력화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경가소성은 인간이 생각과 마음가짐(정신)을 바꾸면 실제로 뇌세포의 물리적 구조(물질)가 바뀐다는 것을 증명하는 현대 뇌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모든 것이 태어날 때부터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새폴스키가 이 신경가소성을 다루는 방식은 지독할 정도로 비겁하고 모순적입니다.



양립론자의 반박: "인간이 노력해서 신경가소성으로 뇌 회로를 바꾸고 운명을 개척했잖아!"


새폴스키의 궤변: "그 노력과 변화마저도 사실은 그렇게 되도록 과거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뇌의 작용이야."



과학철학의 거장 칼 포퍼(Karl Popper)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며 이를 일침을 가합니다. 포퍼는 어떠한 예외나 반증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 버리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가짜 과학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과학적 이론이라면 "이러한 증거가 나온다면 내 이론이 틀린 것이다"라는 반증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폴스키의 결정론에는 반증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습관을 고치고 뇌 회로를 재배선해 운명을 바꾸어 놓아도 그 노력마저 결정된 것이라며 자기 이론에 끼워 맞추기 때문입니다. 어떤 증거를 들이밀어도 결론이 항상 결정론으로 수렴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뇌과학이 아니라 종교적 맹신에 불과합니다. 또한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은 외부 관찰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박쥐의 뇌를 아무리 분석해도 박쥐로 사는 경험은 알 수 없습니다. 뇌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랑의 떨림, 외로움의 무게, 선택의 주관적 질감은 뇌 스캔으로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서울을 가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직접 운전해서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KTX를 타는 방법도 있습니다. 새폴스키의 주장에 의하면 내가 KTX를 타는 이유는 이미 뇌의 과거 자극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비게이션을 보고 길이 막히지 않으면 직접 운전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굳이 막히는 고속도로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는 길이 익숙해서일 수도 있고, 꼭 들러야 하는 추억의 휴게소가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길이 막히더라도 효율성이 아닌 자신만의 주관적 가치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 흔적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저는 자꾸만 반복되는 아픈 관계의 패턴을 최근 알아차렸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와 깊은 연결을 원하다 못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대가로 이별 후에는 깊은 상실감과 고통에 빠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의 아픔을 통해 저는 제게 주어진 이 오랜 관성과 카르마를 스스로 알아차렸고, 의지적 선택을 통해 이를 해소해 나가는 중입니다. 결정론은 인간이 지닌 이 고귀한 성장을 결코 설명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함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역동성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롭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결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때로는 힘을 빼고 내려놓아라, 삶을 좀 편하게 받아들여라"라는 식의 관용과 위로는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 역시 넓게 보면 우리 인생의 거대한 큰 흐름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좁게 보면 그 거대한 흐름 안의 수많은 갈래길은 언제나 우리의 의지와 선택으로 가능합니다. 서울을 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 흐름 안에서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시킵니다.



알아차리면 운명이고, 모르면 우연이다.

- 법륜 스님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우리는 늘 언어의 빈틈 사이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