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모자무싸'에는, 감정 시계라는 것이 등장한다. 주인공 동만과 은아는 감정 시계를 차고 생활하면서, 시계에 표현되는 자신의 감정, '후회' '설렘' '분노' 등을 정확한 언어로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의 큰 줄기 중 하나는 그중 은아와 동만에게만 뜨는 '알 수 없음'이다. 알 수 없는 이 감정은 둘을 묶어주고, 드라마 중반에 가면, 이 감정이 '도와줘'라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연민하며 사랑에 빠진다.
아이가 2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유괴 방지 교육을 받아온 적이 있다. 그때 배웠던 '싫어요, 안 돼요, 도와주세요'라는 말의 운율이 재밌었는지 계속 그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는데, 아주 쉬운 그 말이 너무나 낯설게 들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생각하면, 깊은 산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거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댄다거나, 누군가 쓰러져서 119를 불러달라거나 하는 그런 절박한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우리는 조금 더 '도와줘'라는 말을 가볍게 쓸 수는 없는 걸까?
남자 아이들이 대부분인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 보니, 많은 아이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다. 자발적으로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성숙한 편이지만 수업 중 독서 시간이 있어 '강제로' 오게 되는 아이들 중 몇몇 아이들은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서로 헤드락을 걸고 바닥에 드러누우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처음에 나는 아이들의 말, 그 자체에 귀를 기울였다. c8과 존나를 빼면 오리털 이불을 압축하는 것처럼 말의 내용이 10%로 줄어드는데, 그 10%의 내용도 처음에는 좀 충격적이었다. '일베' 놀이가 청소년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말을 뉴스에서 들었는데 광주가 어쩌구, 노무현이 어쩌구 하는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서 한 마디 해야 하나 혼자 온갖 생각을 했다. 요새는 또 글로벌에 대한 욕구가 있는지, 히틀러에 대한 바카라을 사달라든지, 유대인은 쓸어버려야 해 라면서 지네들끼리 층층이 겹쳐 햄버거를 쌓으며 구텐탁, 모르겐, 하면서 놀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나는 얌전히 앉아 바카라을 읽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런 아이들은 일부야' 하면서 내 자신을 달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말과 행동도 익숙해지자, 더 많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말과 행동의 표현 방식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같은 말을 백 번 천 번 이야기했다. 좆밥 새끼야, 꺼져, 히틀러처럼 쓸어버려야 돼, 유대인 같은 새끼 라고, 말 사이에 틈을 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강박적으로, 구슬에 실 꿰듯 아주 촘촘히 분노의 말과 욕을 반복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성실한 개미나 일벌 같아서, 꽃밭에 풀어준다면, 그 촘촘한 에너지로 수십 통의 꿀을 따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학살에 참여하겠다는 투로 소리 치던 아이들도, 내가 다가가서 '너무 시끄럽다 얘들아'라고 말하면, 몇 초 동안은 잠잠해진다. 개중에는 귀엽게 미소짓는 아이들도 있고, 시선을 피하는 아이들도 있다. 저는 안 떠들었어요, 쟤가 제일 시끄러워요, 하면서 이르는 아이도 있고, 하지 말라잖아, 하면서 친구를 때리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보면, '모자무싸' 박해영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갑자기 아이들이 '감정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성적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친구관계에서 오는 힘듦, 학교생활에 대한 답답함 이 모든 것이 뭉그뜨려진 덩어리들. 귀로 듣게 되는 '말'은 그저 그 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찐득한 진물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들에게 그 감정시계를 채운다면, 나는 아마도 '불안'과 '도와줘'가 제일 많이 표시될 거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에 자주 오는 친구 중에 S가 있는데, 서글서글하게 웃고 덩치가 큰 친구다. 그 친구는 조용하다. 그 친구가 오면 나는 편안해진다. 웃고, 인사하고, 바카라을 자주 빌린다. 어느 날은 그 친구가 땀을 뚝뚝 흘리고 왔길래, '많이 더워?'라고 물었더니, '팝스'했어요, 라고 답한다. '팝스가 뭐야?' '체력측정하는 거예요' '잘했어?' '39개 했어요, 오래 달리기' '잘하는 거야?' '잘 못하는 편이에요.' S는 그렇게 말하고, 웃고, 내가 큐레이션해놓은 바카라 하나를 빌려갔다.
'잘 못하는 편이에요.' 그 조용한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아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의 편안한 웃음과 조용한 말투 속에서 나는 말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그 아이가 감정 시계를 차고 있었다면, 무슨 말이 떴을까. 아마도 '편안'이 뜨지 않았을까 나는 짐작해 본다. 불안한 사람은 그런 말을 담담히 할 수 없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먼 이국 땅의 역사적 빌런, 히틀러가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는 이상한 믿음으로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