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이후, 인간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아직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예측에 가깝다. 그러나 놀란이 지금까지 그려 온 시간과 역사의 모양을 생각한다면, 그가 왜 하필 지금 호메로스의 서사시로 향했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 《인터스텔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말한다. 황폐해진 지구를 떠난 인간은 우주를 가로지르고, 서로 다른 시간 속에 흩어진 인간들은 사랑과 기억을 매개로 다시 연결된다. 이때 사랑은 과학을 대신하는 감상적인 기적이라기보다, 계산만으로는 선택할 수 없는 순간에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을 방향을 가리킨다. 이 영화에서 희망은 현재가 미래를 낳는다는 통상적인 시간의 순서를 거슬러, 미래로부터 과거에 도착한다. 인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후손에게 구원받는다.
반대로 《오펜하이머》에서 미래는 과거로부터 불안의 형태로 밀려온다. 인류의 종말은 언젠가 닥칠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트리니티 실험과 함께 이미 시작된 역사적 조건이 된다. 오펜하이머가 되뇌는 《바가바드 기타》의 문장,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는 예언이라기보다 자신이 이미 열어 버린 시대에 대한 뒤늦은 인식이다. 《인터스텔라》에서 미래의 인간이 과거를 구한다면, 《오펜하이머》에서는 과거의 인간이 미래 전체를 인질로 잡는다. 하나는 미래에서 과거로 도착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번져 가는 종말이다.
그리고 그 두 영화 다음에 《오디세이》가 왔다. 《인터스텔라》가 미래의 허구이고 《오펜하이머》가 과거의 역사라면, 《오디세이》는 허구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신화의 시간에 속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결단과 신의 명령, 자연의 재난과 운명의 징표가 서로 다른 층위로 나뉘지 않는다. 파도는 파도인 동시에 포세이돈의 분노이며, 한 인간의 충동은 그의 내면에서 솟은 욕망인 동시에 신이 불어넣은 생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놀란이 호메로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단지 장대한 모험담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아직 인간과 신 사이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세계였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끝났지만 오디세우스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창과 방패를 내려놓았다는 뜻일 뿐, 전쟁이 인간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전쟁 바깥으로의 탈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형성된 인간이 다시 가정과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의 후일담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또 다른 연장이다.
브루노 스넬의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흥미로운 독법에 따르면 호메로스적 인간에게는 아직 근대적인 의미의 통일된 자아가 선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튀모스, 프렌, 누스와 같은 여러 힘으로 나뉘어 표현되고, 신들은 인간에게 용기를 불어넣거나 판단을 흐리게 하며 행위를 추동한다. 이 독법을 따른다면 《일리아스》의 영웅에게는 행위를 향한 의지가 있지만, 그것을 오직 자기 내부에서 비롯된 결단으로 소유하는 ‘의지의 행위’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파트로클로스가 죽음에 이르러 자신을 쓰러뜨린 존재들을 운명과 아폴론, 에우포르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헥토르의 순서로 지목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인간의 행위는 결코 인간 한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운명과 신과 적의 의지가 한 사람의 죽음 안에 겹쳐진다. 헥토르 역시 자신에게 다가올 파멸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전장으로 향한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생존보다 명예를 우선하는 영웅적 윤리이며, 공동체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시선이다. 《일리아스》에서 인간은 운명을 바꾸기보다 운명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를 선택한다.
그러나 이 세계가 끝내 찬란한 영웅주의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수많은 죽음을 낳고, 그 분노가 멈추는 것은 더 강한 영웅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다. 아들을 잃은 프리아모스와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가 마주 앉아 함께 눈물을 흘릴 때, 두 사람은 승자와 패자 이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일리아스》의 인간성은 영웅이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순간보다, 서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타난다.
《오디세이아》는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사시의 첫머리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이 자신의 무모함으로 정해진 몫 이상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들을 탓한다고 말한다. 운명은 여전히 존재하고 신들은 끊임없이 개입하지만, 인간은 더 이상 그 모든 개입을 자기 행동의 변명으로 삼을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지혜인 메티스는 운명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운명이 허락한 좁은 틈 안에서 살아남을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가슴을 꾸짖으며 참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은 중요하다. 그는 충동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분노를 바라보며 억제한다. 여기에서 인격은 비로소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테나는 여전히 그를 돕고 포세이돈은 그의 길을 막는다. 따라서 오디세우스가 신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근대적 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 신의 개입은 인간의 바카라임을 대신하지 못한다. 신들이 인간을 움직이더라도, 인간은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답해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죽인다. 그러므로 그를 평화로운 휴머니스트로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살육을 목격하고 환호하려는 에우뤼클레이아에게 죽은 자들 앞에서 기뻐하는 것은 불경하다고 제지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폭력은 여전히 벌어지지만, 폭력을 영광으로만 기억하는 태도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오디세우스는 ‘덜 그리스적’이라기보다 ‘덜 일리아스적’이다. 그는 명예를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아킬레우스와 달리, 때로는 이름을 감추고 굴욕을 견디며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붙든다. 《일리아스》에 자기 파괴의 광휘가 있다면, 《오디세이아》에는 자기 보존과 귀환의 지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진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와 제우스로 이어지는 신들의 계승은 폭력의 역사다. 제우스의 시대에 이르러 메티스와 테미스, 곧 지혜와 정의가 질서를 세우지만, 그 질서는 폭력을 완전히 제거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폭력은 패배한 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안에 편입되고 제도화된다. 헤시오도스의 카오스 또한 코스모스가 생겨난 뒤 없어지지 않는다. 세계가 질서를 얻은 뒤에도 카오스는 땅과 하늘과 시간의 순환이 뿌리내린 어두운 터로 남아 있다.
오디세우스의 귀환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전쟁 이전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그가 돌아갈 집에는 이미 전쟁의 부재가 만든 균열이 있고, 그의 안에도 전쟁의 폭력이 남아 있다. 귀향이란 카오스를 몰아내고 완전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카오스를 품은 채 다시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아》의 승리는 《일리아스》를 폐기하는 승리가 아니다. 전쟁의 영웅이 귀환하는 인간으로 변하고, 신과 운명에 흩어져 있던 행위의 바카라임이 조금씩 인간에게 돌아오는 과정이다.
나는 놀란이 이 영화에서 《일리아스》적인 세계와 《오디세이아》적인 세계를 나란히 놓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처음에는 신과 명예와 전쟁이 인간을 밀어가는 시간이 더 크게 보이지만, 여정이 계속될수록 판단과 인내와 바카라임의 시간이 그 자리를 넓혀 갈 것이다. 두 가치관의 긴장은 마지막까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결말이 《오디세이아》의 승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유의지가 필연성을 꺾는 승리가 아닐 것이다. 인간이 필연성 속에서도 자기 몫의 선택을 발견하고, 그 선택이 낳은 결과를 신에게 돌리지 않는 데서 얻는 불완전한 승리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놀란의 세 영화는 인류의 역사에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인터스텔라》는 사랑과 희망이 역사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오펜하이머》는 인간의 지식과 의지가 이미 종말을 돌이킬 수 없게 시작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오디세이》는 그 구원과 종말을 만들어 낸 인간이 과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마저 이용하는 어떤 필연성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어쩌면 놀란이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통해 묻는 것은 두 힘 중 어느 하나의 승리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더라도, 운명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을 바카라임질 수 있는가. 집은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역사를 통과한 인간이 비로소 자신의 바카라임을 떠맡아야 하는 장소가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난 뒤 이 예측이 얼마나 맞았는지는 다시 따져 보려 한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집으로 돌아온 인간은 과연 떠나기 전과 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