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이해: 나와 아이의 세계>

by김동은WhtDrgon


우리가 매일 하는 그 행위는 전자기기의 유리판을 문지르는 일이 아니다. 그건 더 심층적인 무언가, 가령 지금 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부정하고, 누군가와 연결되거나 등을 돌리는 행위에 딸린 부수적인 물리동작이다. "디스플레이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행동"은 물리 세계에서 관찰된 표층일 따름이다.


그 관찰만이 모두라고 믿는다면 독서야말로 괴이한 장애 증상이다. 다 큰 어른이 앉아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는 동작을 몇 시간씩 반복하고 있으니까. 스포츠는 또 어떤가. 구석에 공을 넣겠다고 스물두 명이 잔디밭에서 난리를 친다.


"SNS를 해서 우리 아이가 엉망이 됐다"는 말도 똑같다. 행동의 표층만 보고 그 아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지 못한 것이다. SNS를 막거나 근육질의 교사가 있으면 무언가 해결이 된다고? 진심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게 되면 해를 받느니라."


유유상종, 근묵자흑, 관포지교. 컴퓨터 따위는 흔적도 보이지 않을 시절부터, 누구와 어울릴 것인가에 대한 지혜는 끊임없이 언급되어 왔다. 소셜은 디지털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이 하던 대로 소비할 뿐이다. 새 그릇이 나왔을 뿐, 담긴 것은 인류만큼 오래되었다.


다만 그 오래된 문제가 온라인에서는 낯설어진다. 네 이웃은 본디 집 옆의 집이고, 높은 확률로 같은 문제를 함께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디지털에서 이웃은 어떻게 구분되고 연결되는가.


네 몸은 피와 살이며, 데카르트까지 갈 것도 없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단일체였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내 몸은 어디까지가 나인가. 신변이 한 곳에 매여 있던 몸을, 어떻게 이웃처럼 사랑하고 돌볼 것인가.


마찬가지로 내 아이의 이웃은 어디에 있고, 내 아이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SNS의 문제는 내 몸을 식별하고 인지하고 관리하고 소중히 함에 있고, 네 이웃이 어디까지 펼쳐지는지, 내 몸이 어디까지 동행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통제함에 있다.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을 넘어, 친구를 정해 주고 그대로만 사귀도록 가두는 부모를 부르는 이름은 태고적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건 통제력이 아니라 통제욕이고, 지배일 뿐이다.


인류 탄생 이후 지속되어 온 이 문제를 덜컥 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 앞에 겸손할 수는 있다. (신을 포함하여) 인류의 모든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고민해왔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세계, 그들의 세계관이 있다. 그걸 어른의 세계가 멋대로 조합하려는 시도는 늘 실패로 끝난다. 아이들은 결국 스스로 통제력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교사조차 교사가 없는 교실을 힘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여기야말로 양자역학적이다. 관찰하면 단정하다. 어른이 들여다보는 순간 아이는 관찰당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얌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이의 통제력이 아니다. 어른의 통제감일 뿐이다. 관찰이 거두어지는 순간 아이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통제력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져야 하고, 어른은 통제욕이 아니라 스캐폴딩을 해야 한다. 계단 놓기.


소년의 소셜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들이 성인의 자정을 넘기자마자 술과 담배와 SNS에 통제력을 발휘하며 슬롯활동과 창작에 창의력과 적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이건 저지능의 문제라기보다 과잉지능의 문제, 혹은 옴니포텐스, 전능감의 문제인 것 같다. 기술의 발달이 어른들의 뇌를 홈랜더로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세상은 복잡하지만, 다행히 우리의 고민은 인류와 함께 시작된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삼십 년, 눈 깜짝할 사이에.


김동은WhtDrgon@MEJE.kr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갸루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