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 안의 시간

by남연우

모교인 초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앞면에는 "자랑스러운 100년의 유산 새로운 100년의 희망" 글귀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번 기념사업에 후원을 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그간 수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하였음에도 기부자가 적어서 놀라웠고, 기념비 하단 내 이름이 동문 기부자가 아닌 일반 후원으로 새겨져 있어 의아했다.


몇 해 전 무척 작아진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닐면서 정글짐에 매달린 동창들은 지금쯤 어느 인생 고갯길에 매달려 있을지, 만국기 휘날리는 가을운동회 날 넘어져서 꼴찌로 들어오던 기억 그리고 선생님 오르간 반주에 맞춰 동요를 부르던 창가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용맹한 사자와 호기심 어린 기린이 서 있는 화단에는 졸업 당시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던 세종대왕 동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보았다. 그런데 성군의 오른손이 아파 보였다. 청동 피부를 녹인 세월의 비바람에 허연 석고 뼈대가 드러나 보여 안타까웠다. 이번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그 상처가 봉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액을 기부하고 내 이름 옆에는 괄호 안에 몇 회 졸업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글을 쓸 때 괄호는 여러 의미를 담는다. 설명이나 부연을 덧붙일 때 괄호는 친절하게 이해를 돕는다.

한자 영어 등 외국어를 병기할 때도 쓰이고 약어나 줄임말, 굳이 생략해도 되는 말, 독백을 넣고 싶을 때 문장 속에 손잡이처럼 생긴 들어가는 문을 열어 내용을 넣고 나올 때는 살며시 문을 닫는다. 괄호를 너무 많이 쓰면 자칫 산만해 보이지만 어쩌다 만나는 괄호는 희귀한 만큼 세심한 주의를 요하게 되고 문장의 독해를 완성하는 길잡이 구실을 한다. 꼼꼼한 독자는 괄호 안에 담긴 배려와 암시를 대충 놓치지 않는다.


드러내어 생색내고 싶지 않은 일상의 대부분은 괄호 안에 담겨 묵음 처리된다.

날숨과 들숨 사이 그 날의 감정 생각 떠오르는 기억들이 모래사장에 스며드는 물거품처럼 들썩이다 스멀스멀 가라앉는다. 윗입술과 아래입술을 세로로 세운 것 같은 괄호 속으로 쓸데없는 말들은 꿀꺽 삼키고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는 삶의 태도야말로 청명한 가을을 살아가는 진실한 실존 아닐까. 지금껏 살아온 바 시끄러운 세상은 시끄러운 말들을 편식하고 소비한다. 행함을 뒤로 물린 사탕발림 말부터 앞세운 말들에 혹하였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가족 간에도 뒤늦은 아픔을 수반하지만 행함의 수고로움은 늘 파묻히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아홉 시간 차량 행렬에 시달린 귀성길도 이젠 지긋지긋한데 밑반찬에 명절음식에 도착 날에도 밤 열 시 반까지 혼자 전을 굽고 생선을 찌고 나물거리를 장만하는 그 고단한 손길과 정성을 숱한 시간의 강물이 흘러가도록 내색하지 않았다. 도리를 다하면 그만이겠거니... 도리를 다하는 사람의 숨 막히는 전용이 돼버린 가족의 구조적 모순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내 헛헛한 심정은 고향 들판이 알아준다고 비 오는 가을 들판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걸었다. 알곡이 되는 겸손과 인내를 체득 그저 묵묵히 고개 숙여 걸어가야만 한다. 괄호 안에서 바라본 괄호 바깥은 무성한 쭉정이들의 소란으로 수위가 범람한다. 언제나 전면에 나서서 달콤한 양분을 받아먹고 잘난척하지만 뒷감당은 뒷짐 진 바카라임은 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참어른이 되기 위한 지난한 그 길 알곡과 쭉정이들을 가려내기 위한 긴긴 시간의 바람이 분다.


버려진 줄 알았던 처마 위 제비집이 그새 리모델링 증축되었다. 청바지 뒷주머니처럼 생긴 단칸방 위로 진흙을 개어 붙여 벽체와 천장 틈새를 메우고 실내 공간을 확장, 천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는 비좁은 동굴집을 만들어놓았다. 찬바람이 이미 불어 떠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깃줄에 앉아 지지배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나 반갑다. 그래, 그거면 돼! 모호한 자음이 없는 너희들의 선명한 의성어, 삼짇날 날아올 때를 알고 음력 구월 중양절 떠날 때를 아는 그 의연한 태도와 그 목소리.


유연한 날개를 구부려 멀고 먼 해상 어디쯤 쉬어가는 바위섬에 휴게소를 만들어두고, 다시 쏜살같은 바람결에 내비게이션을 찍는 귀소본능 듬직한 눈초리에는 오직 믿음과 희망 그렇게 살고프다. 네 든든한 날개를 덮은 괄호 안에서 가끔은 아무 소리 내지 않아도 동질감 친밀감 그저 아늑해서 좋구나. 봄날의 새순 같은 올리브나무를 분갈이하고 핑크 용담꽃이 살그머니 꽃잎을 오므리는 해 질 녘에는 능금이 무르익는 노을에 어깨를 기대 본다. 괄호를 오독한 일반인 기부면 어떠랴. 검은 화강석에 새겨진 일백 년은 족히 넘길 모교를 향한 애정 아니던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 가는 뒷모습은 아름답다.





image.jpg
image.jpg
image.jpg

황금 들판이 나란히 마중 나온 가을길 걸어봅니다..

나만의 힐링 로드

"그거면 돼!"

귀성길 정체도 뻥 뚫어주고,

도리를 다하는 고독한 피로감 위무해 줍니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