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내며 쌩쌩 달리는 검은색 도로에 반딧불이 같은 초록불이 들어오면 차량의 홍수는 홍해를 가르듯 길을 낸다. 인도 차양막 아래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우산이 제대로 접히는지 시험해 보았다. 우산대도 반으로 잘 수축하는지 땅바닥에 대고 힘을 주었다. 정상 작동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된다. 처음 사용하는 갈색 우산이 버스를 탈 때 별 말썽은 없을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흰건반 검은건반 꼭꼭 눌러가며 빗방울 연주를 함께 하던 도로 한복판 난데없이 반대편에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우산을 쓰고 있었고, 알아서 피해 가겠거니 생각하던 그 순간 그 사람은 우산으로 나를 들이받았다.
저벅저벅 뛰어오는 상대편 발걸음에 튕긴 빗물이 내 아이보리색 바지에 튀었던 것 같았고 우산이 젖혀지면서 심히 불쾌감을 느꼈다. 널찍한 8차선 횡단보도에 행인은 서너 명 굳이 부딪칠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 정말~"
하면서 우뚝 멈춘 상대를 살짝 흘겨보았다. 멍한 표정의 그 얼굴에 대고 더 뭐라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꺼벙한 청년이었다. 반쯤 남은 도로를 마저 건너며 혼자 씩씩거렸다. 간밤에 꿈이 뒤숭숭하더라니...
연주회에 가기 위해 나름 차려입었는데 길을 나선 초반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지인을 만나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이야길 했더니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그 사람 참 용기 있는 사람이네요."
"네에? 그래봤자 아줌만데 어쩔 건데요." 한바탕 웃고 말았다. 나의 불쾌한 감정에만 충실하여 상대의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기에 지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 짧은 구간 꺼벙한 청년은 우산이라는 장치를 빌려 용기를 내었나 보다. 거기다 대고 뭐라 호통칠 만큼 강심장은 못 되는 아줌마다. 통과 허용시간 30여 초, 그냥 걷기에도 바쁜 구간 아니던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No. 2 in minor, Op.21 'Larghetto' 연주를 들으면서 초록색 풀내음이 나는 초원을 눕혔다 세웠다 미세한 자연의 바람결이 느껴졌다. 오월의 푸른 보리밭 위로 날아다니는 종달새의 지저귐이 들리는 것 같고, 내 고향 푸른 바다 잔잔한 물결 위로 반짝거리는 봄빛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알레그로 비바체' 음률이 빨라지며 풀잎 위로 솟구치는 빗방울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잠잠하던 바닷물이 솟구쳐 파도가 일고, 도미노같이 나뭇잎들을 뒤척이는 바람의 손길로 피아니스트는 음과 음의 이음새를 부드럽게 연주한다.
기승전결 특별히 도드라진 구조도 없이, 드높은 산맥을 오르는 듯 격한 감정으로 이끄는 것도 아닌, 그저 평탄한 구릉을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음정의 길을 그는 무슨 감각으로 저토록 매끄럽게 손가락을 짚어나가는 걸까. 팝에 익숙한 내 귀로 듣는 쇼팽의 피아노 음은 드라마틱한 변화 없이 평이한데 피아니스트는 어두운 길을 밝히는 내비게이션을 보듯 음악을 눈으로 손으로 읽고 청중에게는 청각으로 선사하면서 떠오르는 심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시공간으로 이끈다.
객석 오른쪽 통로 옆에 앉은 나와 같은 라인 무대 연주자는 첼로, 마치 키 작은 사람을 부둥켜안고 여러 곳을 터치하면 가장 깊은 내면의 고독한 울림이 번져 나오고, 활이 현을 스칠 때마다 오래 묻어둔 기억들이 깨어나고, 웅크린 슬픔을 어루만져 따뜻하게 풀어놓는다. 첼로의 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튕겨서 연주하는 피치카토 기법은 베이스 음정이 툭툭 끊기고 튕겨져 올라 이슬방울이 되고 탄력적인 독특한 음색을 들려준다. 마룻바닥에 투명한 구슬이 퉁퉁 튕겨져 구르는 소리에 오래전 기억이 툭 튀어나왔다.
쌀쌀한 퇴근길 횡단보도를 급히 건너가는데 누군가 나를 멈칫 불러 세웠다. 한 달간 함께 일하는 인턴이었다. "시간 있어요? 차 한 잔 마실래요?" 굼뜬 대답을 하기에는 초록불이 깜박깜박 재촉했다. 발길을 꺾어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그는 대뜸 배가 고프다며 닭갈비를 시켰고, 볶음밥까지 먹었다. 카페에 앉아서야 비로소 그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였다. 산꾼보다 빨랐다던 의대 시절 설악산 등반 얘기부터 꺼내는 그의 눈은 깊고 고요한 빙하호 수면처럼 잔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원내에서 줄곧 따라붙던 시선을 알고도 나는 그에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일하는 파트는 어떤 점이 힘든지, 어느 과를 지원할 건지 등등 공적인 질문 사적인 질문 그 어떤 질문도.. 여러 느낌표가 들어있는 그의 신중한 시선이 따갑게만 느껴졌다. 한 달 일하고 떠날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기대한 대로 그는 한 달을 마치고 내가 포함된 저녁 근무자들과 비어펍에서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술은 못한다. 그는 내 옆에 앉았고 여러 잔을 마셨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 같았다. 동료들은 노래방 2차를 가자며 분위기를 띄웠다. 취기가 올라서 나까지 취한 줄 알았던지 "괜찮아?" 물었다. 2차를 가기에 컨디션이 괜찮냐고 묻는 것인데 갑자기 뚝 잘린 반말에 냉큼 토라졌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을 테고 그 정도 반말에 자존심 스프링이 솟구쳤다. 먼저 간다면서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와버렸다. 묵직한 시선으로 쳐다만 보던 그 사람, 차 한 잔에 많은 말들을 삼켰을 그 사람. 어느 날 그가 운영하는 병원 리뷰를 보니 친절하신 선생님이라는 후기가 많았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사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때마침 연주곡은 '로맨스'에 이르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론도 비바체' 마지막 곡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연주자들은 화음이 춤추는 모든 악장을 접고 일어났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모차르트가 태어난다면 저런 모습 아닐까. 아담한 체구에 가지런한 손가락이 단아하고 길어 보이던 곱슬머리 피아니스트, 그도 피아노 건반을 닮은 횡단보도를 건널 땐 두 발로 가볍게 리듬을 탈 것이다. 오래전 그날처럼 집이 멀다는 핑계로 먼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축축한 노면 위로 오렌지색 불빛이 얼룩져 번들거리는 밤비가 여태 내리고 있었다. 어떤 약속과 규칙에 의해 일상의 속도를 접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운명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 나의 운명이 되기엔 새침하고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여러 날에 걸친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저녁노을에 물든 구름,
시시각각
저 소리 없이 움직이는 구름을 연주하는 음악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