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래된 거실 벽시계를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주방 라디오가 고장 나 시계기능이 없어지면서 냄비밥을 짓는 십 분도 사라져버렸다.
도자기로 된 거실 시계를 급히 부엌으로 옮기면서 빈 벽면을 메우기 위해 구입하게 되었다. 공작새 두 마리가 꽃나무에 앉아있는 그림 위로 시침 분침 초침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새 벽시계는 정확한 시계보다는 시간의 바깥을 거니는 공작새의 평온하고 행복한 감정을 동기화시키는 그림으로 읽힌다.
하얀 잔털들이 동그란 눈송이처럼 붙어있는 아이보리색 거실 커튼도 구입한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내 집 장만 꿈에 부풀어 거금 백만 원을 주고 산 커튼인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금액이다. 그땐 이상하게 수입커튼 열풍이 불었었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한 번씩 장만하게 되는 주부들의 로망이었다. 지금도 말짱하고 질리지 않는 걸 보면 본전은 뽑은 것 같다.
어디 탈이 나거나 고장 나지 않고는 물건을 버리는 습성이 못된다. 미니멀리즘이 대세이지만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것은 물건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낭비 아닐까. 그렇기에 물건을 구입할 때는 아주 신중한 편이다. 충동구매에 넘어가기 쉬운 홈쇼핑은 안 본다. 견물생심 물건도 한 며칠 두고 바라보면 간절했던 욕망이 사그라든다. 아이들 어렸을 적 처음 연필을 잡고 구불구불 그리던 곡선,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힘이 생기면서 곡선이 서로 맞물려 동그라미를 그리던 날 그 탄성, 삐뚤빼뚤 눈코입에 눈은 웃고 있던 얼굴, 꽃드레스 입은 이쁜 공주님들이 그려진 스케치북은 두 개의 탑이 되어 두둑이 쌓여있다. 추억의 물건을 미니멀리즘으로 처단하는 건 상실을 도려내는 공허한 아픔이다.
최근 다녀온 백제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에서 마주한 백제 문화의 특징을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으며(검이불루儉而不陋),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화이불치華而不侈)'라고 한다. 품위와 절제를 갖춘 단정한 삶의 태도와 함께 이상적인 미적 감각 또한 놓치지 않았다. 기와지붕 끝자락에 사계절 연꽃 향이 피어나는 수막새들이 그러했고,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맞닿은 모서리에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치미가 그러했다.
화이불치의 걸작품 백제금동대향로는 용이 몸을 비틀어 향로를 떠받친 받침 부분, 불교의 깨달음과 순수함을 지향하는 연꽃 모양 몸체 부분, 산봉우리 사람 동물 악사가 정교하게 표현된 뚜껑 부분에 열두 개의 향연이 새 나오도록 제작되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이 서 있는 당대 최고 수준의 금속공예 기술로 평가되는 백제 예술의 절정에 이른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이 걸작품이 화이불치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물에서 시작하여 땅과 산, 하늘로 이어지는 구도 속에 백제인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와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향연을 피우며 종교적 행사에 쓰인 절제미에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흘러 서민도 세계적 명품을 소비하는 살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 최대 명품 그룹(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3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중동 전쟁 영향으로 중동 시장 매출이 줄어든 데다 전 세계적인 명품 수요 위축으로 유럽·일본 등의 매출이 감소했지만 한국은 3대 명품 브랜드인 에루샤(에르메스·루이뷔통·샤넬)가 모두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호조를 이어가면서 한국이 명품 브랜드 '핵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2025년 5월 타계한 우루과이 무히카 대통령은 23년 된 소형차 폭스바겐 비틀스가 전재산이었다고 한다. 관저에서 살지 않고 사저에서 비틀스를 타고 출퇴근했으며 월급의 90%를 기부했다. 은행 예금도 없고 빚도 없는 그가 퇴임할 때는 신임 대통령보다 주목받고 세계에서 찬사가 이어졌다.
"이 이상한 지도자는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정치인이란 원래 소박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이란 것을 일깨웠다."_ BBC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말과 맞지 않다는 그는 재임 중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이란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지만 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살아온 방식이자 국민 대부분이 사는 방식대로 살고 있다."
"나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살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내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일삼으면 사치가 된다.
부익부에 편중한 사람들의 그것이었으면 좋겠다.
SNS시대 무턱대고 따라 하다간 금 간 거울 속에 일그러진 자화상이 보일 것이다.
명품 하나 없지만 국산 브랜드 여름 가방 하나 장만하고서 행복하다.
명품 가방 들었다고 명품 인간 아니지 않나.
검박한 살림에 먼지를 털어내고, 허브향이 스민 차 한 잔을 음미하다 보면 벽시계 안 공작새가 노니는 평온한 시간이 내게 머문다. 때론 따분한 시간을 뚫고 나온 공작새들이 화려한 날개 깃털을 펼치듯이 촤르르 격식 있는 멋 내기도 필요하다. 검소함과 화려함의 그 중간 어디쯤 절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기도의 향연(香煙)이야말로 부패를 막는 소금 아닐까.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운치를 내 생활의 활기로 덧입힌다.
부여박물관에서 직접 촬영한 '백제금동대향로'
'치미'
'금동광배'
우리 집 노란 장미, 꽃말 "변하지 않는 사랑"을 들려주네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꽃이어서
다가오는 아버지 기일, 아버지를 추념(追念)하며 아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