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자기 전 15분 동안이라도 바카라상 앞에 앉아보기로 했다

by그레이스 그레이트

대학 다닐 때 나는 늘 손에 단어장과 암기장을 들고 다녔다.

잘 외워지지 않는 것들은 작은 메모장에 빽빽하게 적었다.


그때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뒤처지는 것.

잊어버리는 것.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어쩌면 나는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불안을 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많지 않다. 다만 1학년 성적표에 모두 ‘수’가 적혀 있었다는 것, 담임 선생님 이름이 채재숙이었다는 것은 또렷하다. 어느 날 숙제를 안 해 갔는데 얼굴에 도장을 찍혔던 기억도 있다.


그 기억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그 시절 일기장을 써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나는 이제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따뜻한 장면보다 지우고 싶은 장면이 더 많았다.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고, 나는 어디든 숨고 싶었다. 엄마는 울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아야 엄마의 울음도 멈췄다.


엄마는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예술성이 많았고, 국어 시험에서는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던 수재였다고 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엄마가 해준 이야기들을 하나라도 더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201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영원할 것 같던 갈등도 끝이 난다.

한쪽이 사라지면 싸움의 대상도 사라진다.


며칠 전 『필경사 바틀비』를 들었다.

월스트리트의 한 사무실에서 일하던 필경사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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