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수 있는 사이

아내의 부산 팝업, 그 일주일

by손현

지난 목요일, 레디투킥 팝업을 준비하러 수현과 부산으로 갔다. 기차로 먼저 내려와 트럭에 실린 물류를 내리고 새벽까지 현장을 설치했다. 이튿날 일일 판매사원으로 일할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금요일 오후, 부산에 수현을 두고 나는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가는 중. 광안대교에서 저 멀리 오피스텔 하나가 보였다. 2022년 10월, 육아휴직 동안 자발적 독점육아를 자처하며 광안리 바닷가에서 한 달 살이를 하던 곳이다. ‘맞아. 그때 송이랑 저기 단둘이 지내면서 참 좋으면서도 힘들었었지.’ 18개월 송이가 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삼시 세끼를 전용면적 26제곱미터(약 7.8평)의 스튜디오형 원룸에서 지내면서 해먹이며 거의 매일 같이 외출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는 광안리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곳에서 지냈는데 나는 물가 가까이 노는 아이를 붙잡는 꿈을 꾸다가 깨곤 했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웠지만 현지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이 은은한 긴장과 스트레스였다. 유일한 해방은 송이가 낮잠 자는 한두 시간, 또는 옆 도시 경주나 거제로 놀러 가는 차 안에서 잠시 잠들 때였다. 주말마다 송이와 나를 보러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때면 반가움에 눈물이 절로 났다. 억울함? 인정욕구? 내겐 모두 사치였다. 그저 아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 사랑의 시차: 육아휴직 1년 회고 (2023.4.23.)


4년 전, 수현은 창업 준비만으로 바빴을 텐데 주말마다 내려와 줬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짧은 기러기 생활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반갑게 만나고, 일요일 밤 또는 월요일 아침마다 이별했는데, 매번 헤어질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족이란 뭘까. 왜 붙어 있으면 그렇게 투닥대면서, 떨어지면 그리워하는지.


금요일 밤 서울로 돌아왔고, 토요일 점심 다시 송이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레디투킥 팝업이 열리는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6층에서 모녀는 재회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수현이 송이와 먼저 잠들었고 나 홀로 광안리의 LP 바 앵커에 들렀다. (마침 숙소 근처였다) 한 달 살이할 때 우연한 계기로 송이와 찾았던 곳이다. 대표님은 송이 또래의 손주가 있다며 집무실을 보여주고 원 없이 음악을 듣게끔 배려해 주셨다. 꼭 한 번은 인사드리고 싶었다. 그때 고립되어 있던 나에게 음악을 들려주셔서 감사했다고, 딸아이가 이렇게 컸다고 사진을 보여드리며 안부를 나눴다.


앵커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디오 시스템이 늘었고, 바카라과 판도 더 많아 보였다. 그만큼 홀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는 줄었다. 바 테이블에 있던 의자도 사라지고, 거기에 큰 스피커와 앰프, 소스 기기들이 놓였다. 왠지 장사보다는, 본인의 음악 감상과 독서에 더 매진하시려는 모양새였다. 대표는 남궁옥분 CD를 틀어주셨다. 커버에 적힌 앨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아도 꽃은 필 거야>. 애잔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사이로 군데군데 기기에 쌓인 먼지가 보였다. 그새 세월이 흘렀구나.


"대표님, 그나저나 이젠 짐을 줄이셔야 할 때 아닌가요? 오디오도 늘고, 판도 더 늘어나고…."

"내가 현실적 쾌락주의자거든. 듣고 싶은 판이랑 마시고 싶은 술은 또 사야지."


그는 클래식, 재즈, 보컬 등 장르별로 오디오를 각각 세팅해 놓았다. 그러면서 내게 "욕망의 계수가 작으면 돈 쓸 일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본인은 여전히 돈 쓸 일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창때 다른 일로 돈을 크게 벌어본 사람의 농담처럼 들렸다.

광안리 LP 바 앵커(Anchor) / 부산 수영구 광안해변로344번길 17-3 베네치아 빌딩 4층

수현이 신세계 센텀 팝업 현장에 있는 동안, 송이와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을 찾았다. 4년 전 갤러리 팩토리의 홍보라 대표가 송이와 가보라고 일러준 곳인데, 이번엔 옥상 레스토랑 경치가 좋다며 한 번 더 권했다. 역시나 좋았다. '아르프 을숙'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영도의 '아르프'에서 수현, 송이와 점심을 먹은 기억도 자연스레 포개졌다. 우연치고는 몇몇 순간이 연결되고 있었다.


"송이야, 그때 아빠랑 여기 왔던 기억나?"

"글쎄. 잘 모르겠네. 나 너무 어렸을 때 아냐?"

"네가 이쪽에서 막 걸을 때 아빠가 사진 찍었었는데. 걸어볼래?"

"아휴 귀찮은데…. (걷는 시늉을 한다) 자, 됐지?"


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간 건 아니었다. 송이와 추억 여행을 하고 싶었나 보다. 아내도 송이와 단둘이 보낸 시간을 추억하듯, 내게도 그런 소중한 순간이 있다. 우리는 시내로 돌아왔고 저녁에 퇴근한 아내를 만났다.

아르프 을숙 / 부산현대미술관(부산광역시 사하구 낙동남로 1191) 4층

다음 날인 월요일은 백화점 휴무일이었다. 모처럼 세 식구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우리는 해운대 바닷가로 갔다. 아직 바닷물이 차가운데 송이는 거침없이 바다로 향했다. 파도에 떠밀려온 미역이나 톳을 건지는가 하면, 본인 허리춤에 오는 파도 앞에 점프도 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만 보다가, 나도 문득 바닷물에 몸을 담가야겠다 싶어 해수욕을 했다. 이건 순전히 송이 덕분이다. 아이의 세계에 초대받은 느낌이랄까.

송이, 그리고 레디투킥

근처 해수탕에서 목욕까지 마치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수현에게 남은 팝업 기간 동안 힘내라고 응원한 뒤, 송이와 나만 서울행 기차를 탔다.


지난 1주일 새 부산을 두 번 왕복하는 동안, 한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1996년이었던가. 외환은행(현 하나은행) 서울 본점에 다니시던 아버지께 발령이 났다. 발령지는 부산 영도지점. 그때만 해도 나는 너무 어렸고, 온 가족이 부산으로 여행을 가는 줄 알았다. 우리는 해운대 바다와 아버지께서 임시로 머무를 사택을 구경하고 영도에도 갔다.


넷이 같이 내려올 땐 좋았는데, 올라올 땐 셋뿐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풍경이 생생하다. 요즘이야 기차가 워낙 빨라져서 서울-부산 편도가 2시간 17분까지 줄어들었지만,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네 살 어린 동생, 어머니와 함께 거의 6시간이 걸리는 무궁화호, 그것도 입석이라 등을 맞댄 좌석 틈새에 번갈아 앉아 있었다.


입석으로 오는 동안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가 우시니 동생도 따라 울었다. 나는 급 K 장남 모드가 되어 눈물을 꾹 참았다. (아닌가, 나도 울었을 거다.) 그 장면이 생각나는 걸 보면, 어린 시절에 각인된 꽤나 강렬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원가족의 첫 생이별이다. 그렇게 기러기 가족을 처음 2년 정도 경험했고, 이후 몇 번을 더 겪었다. 아버지는 지점장으로 승진한 뒤, 문래동과 청주 등에서 정년을 채우고 은퇴하셨다.


물론 지금 내가 꾸린 가족은 기러기 가족까진 아니다. 우리는 매일 지지고 볶다가, 아내의 부산 팝업이 열리는 일주일 가량 잠시 떨어져 지낼 뿐이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어떤 장면들은 서로 겹쳐 보인다. 이번에도, 4년 전 부산의 어느 식당에서 아점을 먹고 헤어질 때도, 30년 전에도.


기러기는 암수 중 하나가 먼저 죽으면 나머지 하나가 상대를 그리워하며 혼자 산다고 한다. 한국은 1990년대 조기유학 열풍으로 자녀 교육을 위해 부부가 떨어져 사는 가족이 빠르게 늘었고, 요즘은 비단 교육 때문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커리어나 안식년 등 다양한 사유로 단기든 장기든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간헐적으로 이런 이별을 겪어서일까. 남은 삶에서 '기러기 가족'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자식의 독립이든 배우자와의 사별이든 헤어짐은 어차피 찾아올 텐데, 그걸 굳이 앞당겨 연습할 이유가 있을까.


과거 무궁화호에 비하면 절반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KTX로 상경하는 3시간이 아득히 길게 느껴졌다. 부산과 서울은 은근히 멀구나.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누운 침대에서 송이가 말했다.


"또 기차 타고 부산 가면 안 돼? 엄마 보고 싶어."


아이의 진심을 애써 모른 체하고, 토닥이며 같이 잠들었다. 너무 걱정하진 말자. 우린 아직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이다. 이번 금요일 저녁, 아내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