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행 가이드의 회상: 두 번째 업을 내려놓으며
6월이면 보고 싶은 꽃이 있다. 불두화(佛頭花).
하얗고 둥근 꽃모양이 부처의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꽃은 뭉게구름 같고 솜사탕처럼 달고 풍성해 보인다. 그래서 불두화는 꿈 많던 유년기를 떠오르게 하고 앞으로의 삶이 잘 풀릴 것 같은 희망을 안겨준다.
봄꽃들과 달리 초여름부터 피는 연꽃이나 모란, 장미, 수국을 보면 잎이 넓고 모양이 크며 꽃들이 화려하다. 제각기 꽃말이 있는데 불두화는 특이하게도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교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꽃은 부처님 오신 날(5월) 전후에 만개하며 처음 연두색에서 순백색으로 변했다가, 질 무렵 누런 빛으로 변하니 자연의 섭리를 잘 대변하고 있다. 꽃 한 송이 모습에서 인생길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올해도 그 꽃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느 색에 이르렀을까, 무엇을 내려놓을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오늘은 혹 떼는 날이다. 수십 년간 팔 안쪽에 붙어있던 혹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누구는 큰 병원에서 수술하라고 권유했지만 동네 외과로 갔다. 의사는 초음파기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방은 아니고 피지(皮脂)가 1.6센티 크기로 뭉쳐 있어요. 수술을 금방해도 괜찮겠네요."
십 분 만에 피지를 빼내고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봉합했다. 너무 빨리 끝나니 뭔가 허전했다. 간호사가 보여준 피지를 보니 작은 덩어리가 표주박처럼 뭉쳐 있었다. 그동안 아무 통증이나 지장이 없었지만, 여름에 노출되니 보기가 싫어 제거를 해야 했다.
혹만 뗀 게 아니라 5년간 열심히 일했던 '드라이빙 투어가이드' 일도 그만두었다. 힘들어서였다. 준(準) 극한직업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새벽부터 일어나 외국인 손님들을 공항, 호텔 또는 에어비앤비(Airbnb)에서 만나 일정표대로 운전하고, 관광지 안내, 식사, 요구사항 해결, 숙소 바래다주고 귀가하면 한밤중이었다. 단체손님용 관광버스에서 몇 번 가이드로 일해보니 체질상 맞지 않아, 가족 단위 6명 내외의 프라이빗 투어 가이드로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많은 영어권 고객들, 특히 미국과 동남아인들을 만났고, 지금은 유럽인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이 일은 최소 5시간 이상 운전과 손님과의 의사소통, 여러 코스를 도보로 진행하는 체력, 그리고 친절과 다양한 지식이 기본으로 요구되는 업종이었다.
최근 여러 관광객들과 일정을 진행하면서 그동안 불편했던 무릎과 허리가 낫지 않고,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니 말수가 자연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자 손님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언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는 스스로 이 일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동안 만났던 고객들과의 소중한 인연과 경험을 반추하면서 몇몇 기억들을 추려 보았다.
2019년 겨울에 만난 외국 여행객 가족은 점잖고 화목해 보였으며 코스가 좀 독특했다. 말레이시아 변호사 부부와 1남 3녀, 모두 6명으로 3일간 서울과 근교를 둘러보았다. 젊은 자녀들이 희망하는 코스 위주로 신사동 K-Star거리, JYP Cafe, 이태원 외국서점, Cica 미술관, 광명동굴 그리고 홍대거리의 카지노 프렌즈 등이 있었다. 특히 김포에 있는 Cica미술관은 작가의 작업실을 기반으로 손수 일구어낸 문화공간으로 소개되었다. 세계 아티스트들과 연계해서 현대 미술과 시각문화를 주제로 국제전, 행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는데, 딸 중 한 명이 여기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현대 감각의 여러 작품들을 같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으론 일정을 돌다 보면 1~2명이 사라져 버려, 찾느라고 시간이 더 걸렸다. 근처에서 커피를 사거나 올리브영 매장에서 나오지 않아서였다. 3일간 부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수고비까지 은근히 챙겨준, 좋은 인상을 남긴 손님들이었다.
2023년 8월, 국내 새만금에 국제 잼버리행사가 열렸다. 그때 거의 모든 가이드들이 동원되어 잼버리 참여 단체들의 버스 안내와 투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사이프러스 단체 70명을 다른 가이드와 배분하여 1일 인천공항에서 픽업, 저녁 시간에 내려가게 되었다. 밤이 되어 새만금 잼버리 사이트로 찾아 가는데 도로상태도 평탄치 않고 불빛도 희미해서 지정된 위치를 찾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매립지라 웅덩이 곳곳이 파여있고 벌레도 많으며 후덥지근했다. 직감적으로 세계 행사에 준비가 덜 되어 있었고, 입지도 바다 매립지에다 수목이 없어 젊은 스카우트들이 고생을 많이 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폭염과 부실한 기반시설에 대한 항의가 곧 보도되기 시작했다. 씁쓸한 세계 행사로 기억에 남는다.
2024년 10월에 한국에 온 미키(가명) 부부가 올해 5월에 다시 왔다. 미키는 한국인 입양자로 40년 만에 고국에 와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아래 미키의 생가 수색작전 참조)
이번 방문은 투어가 주목적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러 온 것이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미국 이민국(USCIS)이 시민권이 있는 유색인들도 무척 괴롭힌다고 한다. 남편은 잉글랜드계인데 무슨 문제냐고 물으니 유색인과 같이 사니 유색인으로 분류된다고 하며, 2년 정도 트럼프 정부를 피해서 살고 싶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미국인 부부의 삶의 행태가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미키는 서울의 외국인학교 교사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인터뷰, 이력서 작성 등 노력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의 희망대로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 상반기 외국인 입국여행자는 1,07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3% 늘었다고 한다. 통계를 보지 않아도 체감할 수 있다. 지하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외국인들이 눈에 띄고, 남대문시장과 광장시장, 명동거리에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손님들이 한국에서 가장 좋아한 것은 의외로 소박한 것들이었다. 오래된 골목 바로 옆에 고층 빌딩이 서 있는 풍경, 시장에서 상인과 나누는 짧은 흥정, 매끼 달라지는 반찬, 밤늦게까지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거리.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에 가보면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면서, 흰 학이 부리로 물고기를 잡거나 오리들이 무리 지어 가는 모습을 보면 평화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이번 폭염에서도 유럽은 에어컨이 없어 힘든 여름을 보내지만, 우리는 어느 건물이나 아파트에서도 에어컨 덕분으로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장밋빛만은 아니다. 아직도 높은 숙박비와 교통비, 언어소통, 관광정보 부족과 지역 관광 인프라 미비 등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특히 여행사들이 영세하여 인센티브 투어나 MICE와 같은 국제행사는 한국관광공사와 같은 정부기관이 주관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5년간 외국인을 맞이하는 투어 가이드로 일하면서 한 가지 유념한 사항이 있다. 손님들의 첫 접점인 가이드가 좋으면 "I really enjoyed Korea."라고 만족해한다. 반면, 가이드와의 경험이 별로면 "This tour was boring"이라고 즉각 지루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가이드의 품성과 실력, 그리고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소명의식이 없으면 모처럼 방문한 한국에 대해 그저 그렇거나 밍밍한 인상만 남겨주게 된다.
외국인이 경복궁의 설립에 대해 물었을 때, 간단히 연도와 궁궐의 구조에 대답하고 사진을 찍는 정도로 서비스한다면 그들이 만족해할까?
그보다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까지 풍수지리와 유교사상도 얘기하고, 조선의 임금의 일상과 전각들의 용도를 설명하며, 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전통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하면 손님들은 공감하며 한국인을 더욱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면서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설명해 주는 가이드의 가치가 상당히 크다고 하겠다.
혹 떼고 나서 10일 후 실밥을 풀러 갔다. 의사가 말했다.
"잘 아물었으나 수술자국이 조금 남을 수 있어요."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 번씩 자국을 보니 스테이플러로 찍은 모양이 마치 문신하듯 선명하다. 작은 수술도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데 5년간 긴장과 스트레스, 장시간 투어로 지내온 세월이 꿈만 같다. 지난 32년간 근무하던 은행을 정년 퇴임한 뒤, 두 번째 업(業)도 자체적으로 끝맺는다. 그동안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 후회보다 보람이 크다.
불두화도 연두에서 순백으로, 다시 누런빛으로 물들다 진다. 꽃이 색을 바꾸는 것을 두고 시들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쉴 시간이 된 것 같다.
글 손훈 (2026.8.16.)
편집 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