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대신 경험을 판다

뉴욕 출장 단상

by손현

기억나는 장면 하나.

2010년쯤이었나. 전주국제영화제에 '불면의 밤'이란 코너가 있었다. 밤새 세 편의 영화를 몰아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해 테마는 '호러'였다. 무서운 장면에서 관객과 함께 소리를 질렀고, 좀비가 어이없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공기를 털어냈다. 같은 영화를 혼자 봤다면 더 무섭거나, 덜 웃겼거나, 또는 미처 끝까지 보지도 못했을 거다. 해가 밝아올 무렵 숙소로 돌아가던, 그날 새벽이 아련하다.


15년이 넘은 지금, 극장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리모컨만 들면 손쉽게 영화를 무한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한국의 극장 수, 스크린 수, 좌석 수 모두 줄어들었다. 어느 숫자가 먼저 움직인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연간 관객 수는 1억 2,313만 명으로 팬데믹 이전인 2017~2019년 연평균(2억 2,098만 명)의 55.7% 수준이라고 한다.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는 적자가 지속되자 2025년 합병을 추진하다가 무산됐다. 생존을 위한 선택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넷플릭스의 시가총액은 같은 기간 꾸준히 올랐다. 사람들은 영화 개봉 대신 OTT 업로드를 기다린다.


이상한 일도 있다. 2025년 10월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한국 공연, 2026년 1월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현대카드 슈퍼매치(카를로스 알카라스 vs. 야닉 시너) 등은 둘 다 서울에서 제법 먼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예매조차 어려울 정도로 성황리에 끝났다.


집에서 리모컨만 들면 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왜 불편을 감수하면서 극장이나 공연장에 갈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누군가가 벌이는 쇼를 보러 가는 것이고, 나는 가능한 한 최고의 쇼를 보여줄 바카라임을 느낀다. At the movies, we're going to see someone else put on a show, and I feel a responsibility to put on the best show possible." (크리스토퍼 놀란)


놀란은 <인터스텔라> 개봉 전, 뉴욕의 극장을 직접 돌며 스크린 크기를 재고, 사운드의 질을 체크하고, 좌석마다 소리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 확인했다. 그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전국의 모든 극장, 모든 좌석을 점검하고 싶다고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디지털 상영을 "TV in public"이라고 불렀는데, 놀란도 같은 입장이다. 그는 필름의 질감과 색감의 미세한 차이가 관객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극장 경험을 '생생하고 연속적인 꿈'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슬롯학자 노명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카지노 게임 <세종문화N> 22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발터 벤야민의 '오라(Aura)' 개념을 언급했다.


"벤야민의 진단처럼 예술 작품이 기술 복제의 대상이 되면서 전통적인 '오라'는 약화했지만, 역설적으로 기술 복제를 가능하게 한 미디어 기술의 시대가 성숙할수록 새로운 오라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노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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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문화N> 22호

기억나는 또 다른 장면 하나.

2026년 1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란 행사에 다녀왔다. 무대 중앙에 문학동네시인선 시집과 희녹 제품이 놓인 선반이 있었고, 주변에 자유롭게 앉아 시집을 골라 읽으며 음악을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중간에 시인이 나와 직접 낭송하는 시간도 있었다.) 약 3천 석 규모의 객석을 마주 보고 무대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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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 리스닝 스페이지 행사 중. 이단비 드라마투르그와 임유영 시인의 대담

다시 시계를 돌려보자. 2004년 세종문화회관은 관객 감소로 위기를 겪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관객은 2001년 이후 해마다 줄었다”고 보도했다. 20년이 흐른 지금, 같은 공간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극장은 더 이상 ‘보는 곳’이 아닌 ‘경험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이 질문은 극장이 아닌 리테일로 바꿔도 유효해 보인다. 온라인 쇼핑부터 당일 배송까지 간편해진 시대에, 오프라인 리테일의 쓸모는 뭘까.


맨해튼 리테일이 바뀌고 있다

쇼핑은 이미 디지털로 대체됐다. 그러면 사람들이 여전히 매장에 가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까.


팬데믹 이후 뉴욕의 리테일은 경험형 업종이 이끌고 있다. CBRE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맨해튼에서 파인아트·엔터테인먼트 업종은 약 130만 sf, 95건의 계약을 기록했다. 2024년 한 해에만 약 66만 sf를 임차해 연간 리스 물량의 19%를 차지했고, 2026년 1분기에도 이 흐름은 이어졌다. CBRE의 2026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엔터테인먼트 업종이 약 85,770sf를 임차했고, 대표적으로 풍선을 소재로 한 체험형 전시 벌룬 뮤지엄(Balloon Museum)이 올 여름 Pie 17에 첫 상설 공간을 열 예정.

출처: CBRE Manhattan Retail Figures Q1 2026

메타는 5번가 697번지에 15,000sf 규모의 리테일 매장을 열었다. AI 안경과 VR 헤드셋을 직접 체험하는 공간인데, 2025년 팝업으로 시작해 하루 1,000~1,500명이 찾아오자 10년 장기 임대로 전환했다. 소셜미디어의 대명사가 물리적 매장을 낸 것 자체가 흥미롭다.


야외 공원에서나 볼 법한 스포츠도 상업공간으로 들어오고 있다. 내 눈에 띈 건 피클볼과 파델이었다. 월스트리트 근처 빌딩 1층 일부를 실내 피클볼 클럽 피클원(Pickle1)이 임차하여 활용 중이었고, 윌리엄스버그를 걷다가 들른 파델 하우스(Padel Haus)는 클럽 간 교류전이 한창이었다. 회사 가까운 곳에 소셜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래도 출근길이 신나려나. 파델 하우스에는 식음료, 휴게 공간이 있었고 라켓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래 머물수록 식음료·패션·웰니스 소비도 따라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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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는 피클볼과 파델.

사람들이 원초적으로 좋아하는 건 뭘까. 맛있는 걸 먹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함께 웃거나 무서워하거나. 이런 건 여전히 디지털로 대체되기 어렵다. 넷플릭스로 영화를 볼 수는 있어도, 좀비 장면에서 옆 사람과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폭소하는 건 극장에서만 가능하다. 피클볼 영상을 유튜브로 볼 수 있어도, 땀을 흘리며 득점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건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오프라인이 살아남는 영역은 '몸이 참여하는 경험'인 셈이다.


매장도 마찬가지다. 보디(Bode)에서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로어맨해튼에 위치한 여성 매장을 보고 차이나타운을 건너 동쪽에 위치한 남성 매장으로 갔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향 내음이 풍겨왔고 우산을 접고 물기를 털고 나니 또 다른 물소리가 들렸다. 매장에 있는 작은 분수 장식에서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점원의 적당히 나이스한 인사. “비 많이 오네. 천천히 둘러보다 가.”


보디는 에밀리 애덤스 보디 아줄라가 2016년에 설립한 브랜드다. 빈티지 퀼트나 앤티크 레이스 식탁보 같은 소재로 재킷을 만드는, 독특한 세계관의 남성복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로어이스트사이드에 남성 매장, 슈즈, 테일러링 매장을 나란히 열면서 그 일대를 하나의 인디 리테일 상권으로 만들었다. 창업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쇼핑만 하는 동네가 아니라, 장도 보고, 세탁소도 들르고, 운동도 하는 동네에 있는 게 중요하다.”


그날 물건을 사지는 않았지만, 그 매장의 향기, 물소리, 점원의 말투를 기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온라인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상업 공간의 감도는 한없이 높아지고 있지만 SNS에서 엿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시각에 국한된다. 오프라인 리테일의 경험은 결국 접객하는 사람이 완성한다. 말투, 시선, 행동의 디테일. 처음부터 그 브랜드의 페르소나에 가까운 삶의 양식을 지닌 사람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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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e New York - Men's

리테일은 어떤 경험을 제공해야 할까. 모든 브랜드 오너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영역일 것이다. 온라인 매출이 오프라인을 넘어선 브랜드도 있겠지만, 스몰 브랜드 입장에서 맨해튼의 비싼 임대료를 감내하며 순수 쇼룸으로만 운영하기엔 버겁다. 그럼에도 좋은 공간은 희소해지고 있고, 그만큼 들어간 이후의 전략과 실행이 중요해졌다.


과거의 리테일이 무언가를 사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시간을 보내고, 몸을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극장이든, 매장이든, 공연장이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 문을 열고 들어간 매장의 향기처럼.


참고

The New York Times, "The Exacting, Expansive Mind of Christopher Nolan," Oct 30, 2014

노명우, <세종문화N> 22호, '경험의 오라를 판매하는 21세기 극장'

영화진흥위원회, 202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

CBRE, Manhattan Retail Report, Q4 2025 & Q1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