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문제를 알리는 사람이 본 톰 크루즈의 풍자와 극장 밖 현실
톰 크루즈와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가 함께 만든 '디거'를 둘러싼 반응은 개봉 초기부터 크게 갈렸다. 과감하게 양극으로 나눠보자. 석유 재벌이 자신이 초래한 환경 재앙 앞에서 인류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 대담한 풍자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끄럽고 자의식이 과한 소동이다.
평론가들이 갈리는 이유도 흥미롭다. 호주 ABC는 배우들의 앙상블과 정치 풍자의 속도감, 작품의 성격이 뒤집히는 관람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Financial Times는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자극하기보다 미리 대신 생각해 주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기후 전문매체 Grist의 제이크 비틀(Jake Bittle) 기자는 영화 속 논쟁이 이미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한다고 봤다. 기후와 관련된 일을 해 본 사람에게 익숙한 공방을 다시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관객들 반응도 시원치 않다. 톰 크루즈가 내한하면서까지 홍보에 나섰지만 아직까진 국내에서도 흥행할 만한 원동력이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기후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한다. 연구보고서의 새로운 발견을 보도자료 같은 미디어 작업물로 풀어 전하거나, 주로 기자 등 미디어 관계자들을 만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정바카라과 활동이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 이를 기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른다. 기후변화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까지 포괄한다.
그러니 비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앨 고어에 대한 언급, 화석연료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반박, 과학자의 경고를 밀어내는 권력자의 논리. 낯설 리 없었다. 그런데 지루하지는 않았다. 현실에서 반복해서 마주치는 논쟁을 잘 함축하고 비유하면서 뾰족한 유머를 얹은 방식을 영화관에서 보니 오히려 반가웠다. 수많은 기후변화 관련 보고서나 기사,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 토론회와 성명 속에서 다뤄지던 다소 따분한 이야기가 대형 상업영화의 주제가 됐다. 그 사실만으로도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내가 아는 세계를 알아본다는 동질감과, 더 많은 사람이 그 세계를 보게 된다는 기대도 들었다.
그렇기에 이미 아는 이야기라는 비판만으로 이 영화의 전달력을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후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안다고 해서 다른 관객도 아는 것은 아니다. 내게 익숙한 영화 속 유머와 농담이 누군가에게는 기후 논쟁을 처음 접하는 입구일 수 있다. 반대로 내가 낄낄거리며 웃었던 농담의 맥락을 다른 관객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무엇이 반복이고 무엇이 새로운 발견인지는 누가 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 일도 여기서 시작한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지, 그 사람은 무엇을 알고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먼저 생각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디거'의 장면으로 기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듯, 상대가 관심을 가진 곳에서 이야기가 출발해야 한다. 기후 소통을 연구하는 단체 Climate Outreach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인 IPCC의 보고서 저자들을 위해 만든 안내서도 사람들의 생활과 관심에 연결되는 이야기를 권한다. 기온이 얼마나 오르는지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변화가 듣는 사람에게 왜 중요한지 알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다. 이냐리투는 El País 인터뷰에서 한 사람의 이익이 수백만 명의 문제가 되는 권력과 야망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심을 둔다고 설명했다. 이 두 생각은 영화 속 주인공 디거를 통해 연결된다. 디거는 재앙을 일으킨 뒤에도 자신을 필요한 공급자이자 구원자로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만큼, 그 일을 누구의 설명으로 받아들이게 할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대목도 내가 하는 일, 기후 커뮤니케이션과 겹쳐 보였다. 현실의 화석연료 기업도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대중의 인식과 정바카라 논쟁에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기후 관련 활동을 분석하는 연구단체 InfluenceMap은 2022년 보고서에서 주요 석유기업 다섯 곳의 기후 대응 홍보와 실제 투자·정바카라 활동 사이의 불일치를 짚었다. 석유 의존을 줄이려는 기업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과 사업을 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런 홍보가 실제 행동과 맞는지 확인하고, 친환경 이미지를 내세워 실상을 가리는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을 발견해 알리는 것도 기후 커뮤니케이션의 한 양상이다. 상대의 설명에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를 꺼내는 일도 한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누구의 설명을 믿을지를 두고 경쟁하는 셈이다.
이 경쟁에서는 복잡한 연구와 정바카라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긴 보고서에서 어떤 내용을 제목으로 뽑을지, 정바카라의 효과를 누구의 생활과 연결해 보여줄지 골라야 한다. 고르다 보면 현실의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생략하게 된다. 디거를 보며 내 설명은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놓치는지 돌아보게 됐다. 위험을 은폐하는 그의 목적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같은 현실도 어떤 이야기를 앞세우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 점이 너무 익숙했다.
영화가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쪽의 모순까지 건드린 점도 유효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말할 때 전환이 가져올 좋은 미래만 앞세우면, 그 과정에서 생길 갈등을 놓치기 쉽다. IPCC도 재생에너지 확대를 포함한 온실가스 감축 대바카라이 토지 이용과 생물다양성, 지역슬롯의 생계 등에 부담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추진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설비를 어디에 놓을지, 누가 결정할지,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부담을 질지는 에너지원이 바뀌어도 남는 질문이다. 같은 의사결정 구조와 경제 논리 안에서 기득권의 주인만 바뀌는 것은 아닌지, 전환을 요구하는 쪽에서도 물어야 한다.
재생에너지가 선한 미래를 보증하는 상징처럼 이야기될 때 이런 질문은 뒤로 밀린다. 하지만 재생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발이나 자원 조달 방식까지 모두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전기를 많이 쓰는 수도권과 도심은 이익을 누리고, 설비가 들어서는 농촌과 지역은 결정권 없이 부담만 떠안는다면 그것도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산드라 휠러가 연기한 디거의 이복 자매 엠마를 통해 이 맹점을 찌른다. 엠마는 친환경 에너지 기업을 운영하지만, 내게는 그 행태와 지향이 디거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 파는 것이 석유에서 재생에너지로 바뀌어도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장면들이 꽤 신선했다. 전환을 지지하면서도 전환의 과정에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비판이 누구에게 어떻게 쓰일지도 지켜봐야 한다. The Daily Caller에 실린 논평은 영화 속 디거의 연설에서 사람들이 항공편과 배송, 공산품을 요구하면서 석유 생산자만 비난한다는 논리를 가져다 썼다. Breitbart의 존 놀티는 이 영화를 기후 선전물로 규정하고 예상되는 흥행 실패를 조롱했다. 영화의 일부가 화석연료 산업을 방어하는 논리로 읽힌 것이다. 전환에도 갈등이 있다는 지적이 화석연료 의존을 유지하자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전환의 맹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비판이 바카라임 회피에 쓰이지 않게 하는 일. 이 역시 기후 커뮤니케이션에서 오래 마주해 온 어려움이다.
'디거'는 이처럼 서로 다른 쪽이 자기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관객이 그 입장에 편하게 머무는 것은 방해한다. 그 방해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장면은 유럽의회에서 이어지는 디거의 긴 연설이다.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이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기온을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공유했고, 배출을 줄이기로 합의했고, 그 합의를 어떻게 지킬지 논쟁해 왔다. 그 수십 년 동안 경제적·정치적·지정학적 측면에서 무수한 반론이 뒤따랐다. 그 긴 역사가 한 장면에 겹쳐 보였다. 영화는 문제를 안다는 것과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놓여 있는지 압축한다.
톰 크루즈의 열연은 돈과 안락, 안정적인 삶, 편리함과 신속함에 대한 욕망을 한꺼번에 끌어냈다. 관객은 디거의 뻔뻔함을 비웃으면서도, 그가 들이대는 욕망을 쉽게 부정하거나 거기서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내게는 영화관의 관람석이 의회의 자리로 바뀌는 듯했다. 권력자를 구경하던 관객은 어느새 그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시나브로 디거가 역으로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이해관계자가 된다. 디거의 논리가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고 바카라임을 흐리는지 몸으로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이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한 체험이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인 '제4의 벽'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이냐리투가 Dazed 인터뷰에서 설명한 극의 역할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극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웃게 하는 일과, 현실을 설명하는 예술의 중요성과 무용함을 함께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현실을 알아보게 하지만, 이야기를 보는 것만으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디거'는 이 간격을 극과 현실의 경계를 흔드는 방식으로 다룬다. 주인공은 둘 사이를 오가며 몰입하고, 영화는 극 속 환경 문제가 극 바깥에서도 현실이 된 세계를 보여준다. 연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려 거리를 뒀다가도, 그 위험을 허구라는 이유로 밀어낼 수 없게 된다.
엔딩은 그 거리를 한 번 더 좁힌다. 극을 본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는 모습은 실제로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갈 우리와 겹친다. 엔딩크레딧이 흐르는 도중, 극 중 등장한 대기오염 경고가 다시 울리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크레딧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신호인데, 영화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보통 관객들은 등장인물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재앙을 구경한 뒤, 영화가 끝났다는 이유로 안도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안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나가는 일과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은 같지 않다는 것. 영화가 상상한 파국으로 이어질 위기가 우리 현실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상기시킨다. 내게는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제4의 벽이 무너지는 듯했다.
내게는 환경을 지키자는 그 어떤 구호보다 효과적인 메시지였다. 영화 속 위기가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수시로 알아차리게 하면서도, 그 과정이 억지스럽거나 선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재치 있었다.
그렇다면 극장을 나선 관객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기후 이야기가 잘 전달됐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용을 이해한 것과 자기 삶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 실제로 행동한 것은 다르다. 영화에 등장한 기후 용어나 갈등의 맥락을 기억한다고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정바카라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행동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처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역시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디거'가 그런 관심을 만들었다면 그것도 성과다. 모든 영화가 관객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후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문제를 알린 뒤 무엇을 남길지가 중요하다. 유엔의 기후 소통 지침은 위기와 함께 해결바카라을 전하라고 강조한다. 재앙이 얼마나 큰지만 듣고 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석유기업 총수의 이야기 안에서 한 개인의 몫은 초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 배출을 줄일 방법과 함께, 기업과 정부에 어떤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지도 알려줘야 관심이 참여로 이어질 여지가 생긴다.
영화에는 그보다 앞선 과제도 있다. 먼저 관객을 만나야 한다. 10월 5일 확인한 Rotten Tomatoes의 비평가 긍정 평가 비율은 51%, 관람 인증 관객의 긍정 평가 비율은 71%다. 두 집계에서는 관객이 평론가보다 우호적이지만, 북미 개봉 관객 조사인 CinemaScore는 C+에 그쳤다. 제작비가 최소 1억 2,500만 달러로 보도된 영화의 첫 주말 전 세계 티켓 매출은 약 2,000만 달러로 추산됐다. 지금으로서는 관객을 폭넓게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넓은 관객에게 닿으려면 알아보고 즐길 수 있는 인물과 상황이 필요하다. 그런데 익숙한 논리를 보여주면 반복이라는 쓴소리가 들린다. 낯선 형식으로 새로움을 만들면 이해의 문턱이 높아진다. 기후 정치의 맥락과 영화의 형식을 동시에 해독할 준비가 된 소수에게만 닿는다면, 대중에게 말을 걸려던 시도가 엘리트 예술의 영역에 머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흥행은 장담할 수 없다. '디거'의 부진을 이런 형식이나 주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어려움을 생각하게 한다. 그 숫자가 영화가 남긴 경험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내게 '디거'는 기후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 속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시도다.
엔딩크레딧이 흐르면서 지은 마지막 웃음은 쓸쓸했다. 풍자와 유머 뒤에는 기후 재앙이 남았다. 영화가 보여준 딜레마를 따라가다 보니 어떤 기후운동이 올바른지, 어떤 말로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야 하는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전환을 지지하면서 그 과정의 모순까지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중요한 갈등을 빠뜨리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영화관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이유다.
그래도 이 질문들을 관객의 경험으로 만든 방식에는 호평하고 싶다. 배우들의 열연, 익숙한 담론을 날카롭게 압축하는 유머, 관객의 위치를 바꾸는 연출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톰 크루즈의 긴 연설, 그리고 극 속 관객의 퇴장을 우리의 퇴장과 겹쳐 놓는 액자식 구성의 엔딩은 특히 신선했다. 다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가져오지 않을까 기대도 된다. 그 상이 톰 크루즈의 생애 첫 남우주연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