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홍수와 인간이 위험을 알아보는 방식에 관하여
제목은 밥 딜런의 노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You don’t need a weatherman, To know which way the wind blows)이다. 물론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는 노래는 아니다. 하지만 2026년 여름 네팔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있으면 이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26년 8월 26일, 네팔 히말라야 랑탕 리룽의 북쪽 사면이 무너졌다. 암반과 빙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고, 계곡에 도달한 거대한 덩어리는 물과 토사를 휩쓸면서 빠른 토석류로 변했다. 재난은 하류로 빠르게 번졌다. 이후 분석에 따르면 사태의 시작은 지진이 아니라 대규모 암반·빙하 붕괴였다. 붕괴에서 홍수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불과 몇 분 단위로 진행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재난과 함께 뜻밖의 영상 하나가 화제가 됐다. 12년 전인 2014년 방송된 EBS 다큐멘터리 「히말라야의 대재앙, 빙하 쓰나미」였다. 제작진은 해발 5,000m 부근에 있는 네팔의 임자호수를 찾아가 빙하가 녹으면서 커지고 있는 빙하호와, 자연제방이 붕괴할 경우 하류에 닥칠 수 있는 빙하호 범람홍수, GLOF의 위험을 다뤘다. 2026년 재난 직후 다시 공개된 영상은 수백만 회 조회됐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12년 전 화면 속 사람들이 미래의 재난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퇴하는 빙하, 불안정해지는 히말라야, 커지는 빙하호, 그리고 언젠가 하류를 덮칠지도 모르는 거대한 홍수. 오래전에 공개된 영화의 스포일러를 뒤늦게 확인하는 기분에 가깝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2014년 다큐멘터리가 다룬 것은 임자호수의 빙하호 범람 위험이었고, 2026년 재난의 출발점은 랑탕 리룽에서 발생한 대규모 암반·빙하 붕괴였다. 같은 장소에서 예고된 바로 그 재난이 12년 뒤 그대로 벌어진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 역시 이번 붕괴를 곧바로 기후변화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온난화는 빙하의 형태 변화, 영구동토의 약화, 암반 균열과 융빙수 증가 등을 통해 고산지역의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지만, 이번 특정 붕괴에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문제다.
그런데 바로 이 차이 때문에 12년 전 영상은 오히려 더 흥미롭다. 그 방송은 미래를 정확하게 맞힌 예언이 아니다. 정확한 장소와 날짜를 맞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위험의 방향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기록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서 더 큰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19세기 중반 이미 과학자들은 대기를 구성하는 특정 기체가 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유니스 푸트는 1856년 이산화탄소가 들어 있는 공기가 더 강하게 가열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고, 몇 년 뒤 존 틴들은 수증기와 이산화탄소 등이 적외선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정밀하게 측정했다. 1896년 스웨덴의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크게 증가하면 지구의 온도 역시 상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사실 기본적인 과학적 기반은 100년도 더 된 시기에 다져졌다.
1938년 영국의 가이 캘런더는 실제 기온 관측자료와 이산화탄소 증가를 연결했다. 1958년에는 찰스 데이비드 킬링이 하와이 마우나로아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지속적으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그래프에는 계절에 따라 오르내리는 작은 톱니와 함께 한 방향으로 계속 상승하는 선이 나타났다. 우리가 지금 ‘킬링 곡선’이라고 부르는 그래프다. 1950년대 후반 약 316ppm이었던 마우나로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이제 420ppm을 훌쩍 넘어섰다.
1965년 미국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는 화석연료 연소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것이 기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백악관에 경고했다. 1979년 이른바 ‘차니 보고서’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두 배가 될 경우 상당한 지구온난화가 발생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1988년에는 IPCC가 만들어졌다. 역사를 이렇게 펼쳐놓고 보면 한 가지 사실은 꽤 분명하다. 인류에게는 오래전부터 스포일러가 있었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두고 “언제 알았는가”라는 질문은 오히려 쉬운 편인지도 모른다. 더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알고 있었는데 왜 충분히 위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안다’라는 말 자체의 함정이 있다. 이산화탄소가 지구를 덥힌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결과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아는 것, 그 위험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위험을 줄이기 위해 지금 비용을 치러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 그리고 실제 행동하는 것은 모두 다른 단계다. 우리는 흔히 이 사이를 너무 쉽게 건너뛴다. 지식이 충분히 쌓이면 행동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인간과 슬롯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이를 설명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심리적 거리’였다. 기후변화는 인간의 감각에 상당히 불친절한 위험이다.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나면 위험을 이해하기 위해 모델이 필요하지 않고, 연기를 맡으면 불이 났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300ppm에서 400ppm을 넘어가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산업혁명 이후의 평균기온 상승도 하루아침에 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원인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결과는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난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나중에’, ‘저 먼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여기에도 단순한 해답은 없다고 말한다. 기후변화를 더 가까운 문제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해서 행동이 자동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위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의 일부라면, 위험을 가깝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해결바카라의 일부일 뿐이다.
사람은 위험을 안다고 반드시 행동하지 않는다. 심지어 위험을 두려워한다고 반드시 행동하지도 않는다.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갈등, 슬롯적 규범, 당장의 비용, 행동의 효능감과 제도가 그 사이에 놓여 있다. 개인 한 사람이 내일의 재난을 심각하게 걱정한다고 해서 혼자 발전소를 바꾸거나 도시의 인프라를 옮기거나 국가의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후변화는 위험 인식의 문제인 동시에 집단행동의 문제다.
네팔의 재난이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시간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산악재해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몇 개의 시계가 있다. 하나는 수십 년에 걸쳐 움직이는 느린 시계다. 빙하가 후퇴하고, 영구동토가 약해지고, 암반에는 균열이 쌓이며 산의 구조가 조금씩 달라진다. 다른 하나는 초와 분 단위로 움직이는 빠른 시계다. 어느 순간 암반과 얼음이 무너지고, 물과 토사를 끌어들이며 계곡 아래로 질주한다.
그 사이에는 슬롯의 시계가 있다. 이상 신호를 관측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하고, 예상 피해지역을 계산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앞의 두 시계는 자연이 움직이지만 마지막 시계는 인간이 만든다.
이 구분은 기후변화 전체에도 꽤 잘 들어맞는다. 기후시스템에는 느린 시계가 있다. 온실가스가 축적되고, 바다가 열을 흡수하고, 빙하가 줄어들고, 생태계와 지형이 변한다. 재난에는 빠른 시계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고, 산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하고, 산불이 번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은 관측하고, 이해하고, 토론하고, 법을 만들고, 돈을 쓰고, 인프라를 바꾼다.
문제는 자연의 느린 시계가 인간에게 너무 느리게 보인다는 것이다. 1년에 몇 ppm씩 상승하는 이산화탄소, 10년에 몇 분의 1도씩 올라가는 평균기온, 해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빙하는 매일 뉴스를 차지하기에는 너무 느리다. 그러다가 어느 날 느린 변화가 빠른 사건으로 압축된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변화가 몇 분의 붕괴로 나타난다. 그래프였던 것이 장면이 되고, 통계였던 것이 영상이 된다. 인류가 목격하지 못한 광경,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하게 휩쓸려 나가는 것을 뉴스와 소셜미디어에서 보며, 인류의 인식 차이는 일순간에 급격히 좁혀졌다.
그리고 장면이 된 뒤에야 우리는 묻는다. 왜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누군가는 대개 경고하고 있었다. 네팔에서도 그랬다. 2014년 EBS의 카메라 앞에서 히말라야 주민과 연구자들은 이미 변화를 이야기했다. 빙하가 줄고 있었고 빙하호가 커지고 있었으며, 하류의 마을은 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경고가 2026년 8월 어느 날 어느 산이 무너질지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과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재난의 날짜와 장소를 맞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위험이 커지고 있는지 알아내고, 어떤 조건에서 피해가 커질 수 있는지 파악하고, 불확실성이 남아 있어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정확한 붕괴 시각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사람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차이는 기후위험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하다. 예측과 대비를 혼동하지 않는 것. 불확실성과 무지를 혼동하지 않는 것.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위험을 인식하는 데 꽤 능숙한 동물이다. 다만 눈앞에 있는 위험에 특히 능숙하다. 집 주변 작은 재난으로 인명사고 소식으로도 하루가 뒤숭숭해진다. 문제는 현대슬롯가 만들어낸 가장 큰 위험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후변화도 그렇고, 생물다양성 붕괴나 감염병 같은 위험도 그렇다. 작은 변화와 긴 시간,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위험이 자라다가 어느 순간 사건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문명에는 본능과 다른 종류의 감각기관이 필요하다. 과학과 관측망, 통계와 모델이 그것이다.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없는 변화를 대신 감지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감각기관이다. 킬링 곡선은 대기에 달아놓은 계기판이고, 기후모델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보내는 탐사선이다. 히말라야를 내려다보는 위성과 산의 떨림을 기록하는 지진계는 인간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을 살피는 신경망이다.
그러나 감각기관이 신호를 보내는 것과 몸이 움직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경고는 울리고 있는데 행동으로 연결되는 회로가 느릴 수 있다. 기후변화의 역사를 돌아볼 때 섬뜩한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던 시간이 생각보다 짧고, 알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움직이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이다.
그래서 12년 전 네팔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는 경험이 묘하다. 화면 속 사람들은 미래를 알지 못한다.
2026년 8월 어느 날 어느 산이 무너질지 모른다. 우리도 다음 재난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위험이 어떤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지는 상당 부분 알고 있다.
미래를 모른다는 말과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기후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발견된 재난이 아니다. 19세기의 실험실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20세기의 관측소에서 그래프가 됐으며, 컴퓨터 속에서 미래의 기온으로 계산됐고, 국제기구의 보고서를 거쳐 이제는 세계 곳곳의 풍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밥 딜런의 문장을 빌리자면, 기상학자가 없어도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기상학자도, 기후과학자도, 위성도, 수십 년의 관측자료도 있다.
문제는 이제 바람의 방향을 아느냐가 아니다.
그 방향을 알고도 계속 같은 곳으로 걸어갈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