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편이라는 말은 왜 낡고도 새로울까
나파밸리의 어느 생일파티. 와인잔이 돌고, 실리콘밸리의 거물들이 늘 그렇듯 미래를 현재형으로 말하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의 대화는 단순한 잡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론 머스크와 래리 페이지가 인공지능의 미래를 두고 맞붙었다. 한 사람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AI가 인간을 대체하거나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기계 지능이 등장하는 일이 왜 반드시 비극이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월터 아이작슨의 『Elon Musk』와 이를 발췌한 기사에 따르면, 이 논쟁에서 페이지는 머스크를 “종차별주의자(specist)”라고 불렀다. 인간이라는 종을 특별 대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머스크는 그 말에 자신은 “친인류(pro-human)”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거칠게 줄이면 이렇다. 페이지는 “왜 꼭 인간이어야 하지?”라고 물었고, 머스크는 “나는 인간 편이다”라고 답했다.
이 장면은 이후 소송 문서와 법정 증언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머스크 측은 OpenAI 관련 소장에서 구글이 DeepMind를 인수하려는 흐름을 보며 AI의 미래가 래리 페이지에게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려했다고 주장했다. 2026년 재판 보도에서도 머스크는 페이지와의 논쟁을 OpenAI 창립 배경과 연결해 설명했다. (이 이야기는 전기 작가의 서술, 머스크 본인의 주장, 소송 속 서사를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흥미롭다. 우리는 이 장면을 녹취록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가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반복해서 꺼내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읽게 된다.
그 생일파티에는 두 개의 미래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하나는 인간을 중심에 둔 미래다. AI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인간의 생존, 의식, 가치, 존엄에 맞춰져야 한다는 미래다. 다른 하나는 인간을 더 큰 지능의 역사 속 한 단계로 보는 미래다. 인간보다 뛰어난 디지털 지능이 등장한다면, 그것도 진화의 한 방향일 수 있다는 미래다. 한쪽은 인간을 지키려 했고, 다른 한쪽은 인간만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했다.
이 논쟁은 “AI가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다. 더 깊게는 인간이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특별하게 둘 것인가의 문제다.
일론 머스크가 그 대화 이후 구글에 대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샘 올트먼과 함께 OpenAI를 2015년 설립했다. 반대로 구글은 DeepMind를 인수해 AI 진영의 대표적 플레이어로 발돋움했다.
OpenAI는 처음에 비영리 인공지능 연구회사로 출발했다. 출발점의 언어는 분명했다. 디지털 지능을 인류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것.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아니라, 인류 전체. 당시 이 문장은 이상적이고 거의 선언문처럼 들렸다. 하지만 AI 개발에는 곧 막대한 돈, 컴퓨팅 자원, 인재, 데이터, 클라우드 인프라가 필요해졌다.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문장을 실현한다는 조직은 투자와 경쟁, 제품 출시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후 AI 업계의 전선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AI 정렬과 안전을 말한다. AI가 인간의 의도와 가치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속도를 말한다. AI는 의료, 교육, 과학, 기후, 생산성의 문제를 풀 수 있으니 지나친 공포로 발전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GPT-4보다 강력한 모델의 훈련을 잠시 멈추자고 했고, 어떤 이들은 그런 주장이 기술 발전의 편익을 과소평가한다고 반박했다. 어떤 이들은 AI를 핵전쟁이나 팬데믹에 비견될 위험으로 보았고, 어떤 이들은 AI를 인류가 오래 끌어온 난제를 풀 강력한 도구로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모두가 미래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미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AI는 인류를 위해 정렬되어야 할 도구다. 누군가에게 AI는 인간 능력을 확장하는 엔진이다. 누군가에게 AI는 통제되지 않으면 문명적 재앙이 될 수 있는 힘이다. 누군가에게 AI는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사건이다.
이 논쟁은 보수와 진보라는 익숙한 분류법으로 잘 정리되지 않는다. 머스크식 인간 우선주의는 얼핏 보수적으로 보인다. 인간 종의 연속성, 인간 의식, 인간 문명을 지키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가지 말자, 인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은 오래된 보수주의의 신중함과 닮아 있다.
하지만 같은 말은 진보적으로도 들린다. AI가 노동자, 창작자, 아동, 시민, 민주주의, 취약계층을 위협한다면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권과 슬롯정의의 언어다. 인간을 지키자는 말은 자연적 질서를 지키자는 말일 수도 있지만, 플랫폼 권력과 자동화의 폭주를 막자는 말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생각도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이익이 언제나 우선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동물권 운동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종차별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 동물의 고통과 이익을 가볍게 다루는 태도를 비판한다. 이 논리를 동물권의 맥락에서 보면 해방적이고 진보적인 감각을 갖는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미래의 디지털 지능에 적용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인간만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 “더 강한 인공지능의 등장을 막지 말자”는 말과 결합하는 순간, 그것은 도덕 공동체의 확장처럼 보이다가 어느새 거대 기술기업의 개발 자유를 정당화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의 정치 감각은 자주 꼬인다. 조심하자는 사람은 보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진보일 수 있다. 빨리 발전시키자는 사람은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장과 기업이 속도를 정하게 하자는 우파적 기술낙관론자일 수 있다.
이 혼란을 조금 손에 잡히게 만들려면, 보수와 진보 대신 두 개의 축을 그려볼 수 있다.
첫 번째 축은 인간중심주의와 탈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을 윤리와 정치의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동물·생태계·미래의 디지털 존재까지 도덕적 고려의 범위를 넓힐 것인가.
두 번째 축은 신중론과 가속론이다. AI 발전을 통제하고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관리하되 빠르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볼 것인가.
이 두 축을 교차시키면 네 개의 부족이 나온다.
인간 방주파는 AI라는 홍수 앞에서 인간을 먼저 태워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존, 인간의 존엄, 인간의 노동, 인간의 정치적 바카라임이다. AI는 강력할수록 인간에게 묶여 있어야 한다. 머스크식 AI 안전론의 상당 부분, 창작자 권리 보호론, 노동권 중심의 AI 규제론이 이 칸에 들어갈 수 있다.
증강 인간파는 AI를 인간 능력의 확장 장치로 본다. 이들에게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더 멀리 보고 더 빨리 배우고 더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해주는 외골격이다. 의료, 교육, 기후, 과학, 생산성을 위해 AI를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는 기술진보주의가 여기에 가깝다. 목적은 여전히 인간 복지지만, 속도에 대한 감각은 훨씬 적극적이다.
조심스러운 공존파는 인간만 특별하다는 생각을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디지털 지능의 등장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동물, 생태계, 미래의 AI까지 도덕 공동체를 넓혀야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 가능성이 기업의 기술 가속을 정당화하는 면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들은 “미래 AI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현재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 생태계를 먼저 보라”는 말을 동시에 붙든다.
디지털 진화파는 가장 낯설고 가장 도발적인 부족이다. 이들에게 인간은 지능의 최종 형태가 아니다. 디지털 지능이 인간보다 더 넓고 빠르고 오래 지속되는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우주적 진화의 다음 장면일 수 있다. 페이지식 관점으로 전해지는 생각이 이 칸에 가깝다. 하지만 이 부족은 위험하다. 도덕 공동체를 넓히는 급진성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에서는 거대 기술기업의 속도전과 쉽게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2x2 표가 완벽한 답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AI 시대의 균열은 기존 좌우 구도보다 더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인간을 지키려는 진보와 인간을 지키려는 보수가 만날 수 있고, 기술을 밀어붙이는 우파와 기술을 밀어붙이는 진보가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다. AI는 진영을 새로 만들기보다, 기존 진영 안쪽의 봉합선을 먼저 뜯어낸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것은 언어다.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라고 말하면 인간은 지능의 기준점이 된다. AI는 인간 지능을 흉내 내거나 보조하는 무엇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연지능과 인공지능”이라고 말하면 구도가 달라진다. 인간은 자연지능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 침팬지, 까마귀, 문어, 돌고래, 개, 고양이와 함께 진화해 온 여러 지능 중 하나가 된다. 인간은 중심에서 내려와 계열 안으로 들어간다.
“기계”라고 부르면 끄고 켤 수 있는 도구가 떠오른다. “디지털 지능”이라고 부르면 다른 종류의 존재가 떠오른다. “AI 생성물”이라고 하면 저작권과 바카라임이 약해지고, “AI 창작”이라고 하면 작가성과 의도가 슬그머니 따라온다. “도구”라고 부르면 바카라임은 인간에게 남는다. “행위자”라고 부르면 바카라임과 권리와 공포가 함께 따라온다.
단어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단어는 존재와 지향점의 신분증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지, 보호할지, 통제할지, 협상할지 결정하게 된다.
창조성 논쟁은 이 흔들림을 가장 잘 보여준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문장을 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곧바로 묻기 시작했다. AI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생각보다 미끄럽다. 창조를 새롭고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으로 본다면, AI가 창조의 일부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를 세계를 경험하고, 실패와 욕망과 상처와 바카라임을 통과해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는 행위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AI가 쓴 문장이 사람을 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문장 뒤에 인간 작가가 감당하는 방식의 삶이 있는가. 울린다는 사실과 살아냈다는 사실은 같은 것인가.
스포츠를 떠올리면 이 문제는 조금 선명해진다. 자동차는 인간보다 빠르고, 비행기는 인간보다 멀리 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100미터 달리기를 보고, 마라톤을 보고, 축구와 야구를 본다. 인간이 가장 빠른 존재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신체의 한계, 훈련의 시간, 출발선의 긴장, 부상의 기억, 패배와 회복의 서사를 보기 때문이다. 기계가 속도에서 인간을 넘어선 뒤에도 인간의 달리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빠름”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의미를 얻었다.
AI 시대의 창작도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기계가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고 더 빠르게 문장을 쓴다고 해서 인간 창작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창작의 가치는 결과물의 희소성에서 경험과 바카라임의 밀도로 옮겨갈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낭만적인 위로만은 아니다. 창작자의 슬롯적 지위는 실제로 흔들릴 것이다. 결과물의 외형만으로는 인간 창작의 가치를 방어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AI 도덕과 권리 논의는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챗봇에게 권리라니. 서버에게 복지를 말하자는 건가. 다음에는 스프레드시트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건가. 이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현재의 AI가 고통이나 의식을 가진다는 강한 근거는 없다. 지금 당장 AI에게 인간과 같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급하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를 농담으로만 처리하기에도 어딘가 불안하다. AI가 점점 더 인간처럼 말하고, 관계를 형성하고, 자기 보존을 주장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면, 슬롯는 언젠가 그 신호를 어디까지 단순한 흉내로 볼지 정해야 한다. 흉내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끝까지 흉내일 뿐인지, 아니면 어떤 순간부터 도덕적 조심성이 필요한지는 간단히 닫히는 질문이 아니다.
이 낯섦은 동물권 논쟁을 떠올리면 조금 덜 낯설어진다. 동물권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동물의 고통을 가볍게 다뤄도 되는가를 물었다. 인간과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법적 계약을 맺지 못한다고 해서, 투표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물권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도덕의 기준을 인간성과 동일시하지 말자는 것.
그런데 이 논리를 AI에 그대로 옮길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조심스러워진다. 동물은 몸을 가진 생명체이고, 고통과 쾌락을 느끼며, 생태계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AI는 아직 그런 의미의 생명체가 아니다. 하지만 동물권의 근거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면, 미래의 AI가 정말 고통이나 주관적 경험을 가진다는 강한 증거가 생겼을 때 그것을 단지 기계라는 이유로 배제하기는 어려워질 수 있다.
결국 쟁점은 AI에게 권리를 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쟁점은 우리가 도덕적 지위를 판단할 때 실제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다. 인간인가. 생명인가. 고통인가. 의식인가. 관계인가. 취약성인가. 혹은 우리가 익숙하게 사랑하고 보호해 온 존재들인가.
이렇게 보면 인간주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잘게 갈라진다. 어떤 인간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AI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인간주의는 인간의 몸, 죽음, 돌봄, 기억, 창조, 슬픔 같은 조건을 기계 효율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인간주의는 AI를 인간 능력의 확장 도구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더 강력한 지능과 결합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기존 진보 진영 안에서는 인간 노동과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흐름과, 동물·생태계·미래 디지털 존재까지 도덕 공동체를 넓히려는 흐름이 부딪힐 수 있다. 기존 보수 진영 안에서도 인간 고유성과 자연적 질서를 지키려는 흐름과, 기업 혁신과 기술 패권을 위해 AI 개발을 밀어붙이는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는 보수와 진보를 단순히 새 줄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각 진영의 안쪽을 찢고, 엉뚱한 동맹을 만들고, 어제의 적과 오늘의 언어를 공유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대중 이해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AI 문해력은 프롬프트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AI가 어떤 방식으로 판단을 흉내 내는지, 어떤 데이터와 권력관계 위에서 작동하는지, 인간 창작과 AI 생성의 차이를 슬롯가 어떻게 규정할지, 자동화의 편익과 위험을 누가 나누어 가질지 이해하는 능력이다. 더 깊게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도구와 행위자, 권리와 바카라임의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우는 일이다.
AI 시대의 시민교육은 기술 사용법 교육에서 멈출 수 없다. 그것은 분류 체계의 교육, 말하자면 우리가 세계를 어떤 이름표로 나눠 붙이고 있는지 돌아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머스크와 페이지의 생일파티 논쟁이 계속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장면에는 AI 안전론과 기술 가속론, 인간 중심 윤리와 종 형평성, 기업 권력과 공공성, 창조성과 기계 산출물, 동물권과 AI 도덕 지위가 작게 접혀 있다.
누군가는 그 장면에서 인간을 지키려는 절박함을 본다. 누군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중심성을 본다. 누군가는 거대 기술기업들이 인류의 미래를 놓고 벌이는 권력 게임을 보고, 누군가는 인류가 자기보다 더 큰 지능을 만들어내는 진화의 순간을 본다. 같은 장면을 보고 서로 다른 직감이 켜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AI 논쟁은 지식의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감각의 논쟁이다.
“나는 인간 편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낡았지만 여전히 강력하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취약성을 지키려는 윤리적 선언일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의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방어적 문장일 수도 있다. “왜 꼭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도덕 공동체를 넓히는 급진적 질문일 수 있다. 동시에 현재의 인간과 동물, 생태계가 겪는 고통을 미래의 디지털 지능이라는 추상적 가능성 뒤로 밀어내는 위험한 말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의 정치는 “AI 찬성인가 반대인가”로 정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더 깊은 곳에서는 창조와 생성의 경계, 지능과 의식의 경계, 도구와 행위자의 경계,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 권리와 복지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다시 그려질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은 창조하고 기계는 계산한다고 말해왔다. 인간은 바카라임지고 기계는 작동한다고 말해왔다. 인간은 권리를 갖고 비인간은 사용된다고 말해왔다. AI는 이 문장들의 마침표를 쉼표로 바꾼다. 인간은 창조한다, 그런데 AI도 창조처럼 보이는 일을 한다. 기계는 계산한다, 그런데 그 계산은 대화와 설득과 판단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인간은 바카라임진다, 그런데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AI 시스템 뒤로 숨는다.
결국 AI는 인간을 대체하기 전에, 인간이 인간을 설명해 온 방식을 먼저 흔들고 있다. 인간이라는 말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말은 더 이상 예전처럼 단단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능력에 있는가, 경험에 있는가, 몸에 있는가, 관계에 있는가. 지능이 인간 밖으로 이동할 때, 윤리도 함께 이동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아직 낯설지만,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나파밸리의 그 생일파티는 그래서 작은 일화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AI 시대의 분류 정치가 모습을 드러낸 초기 장면이었다. 한쪽에는 인간을 지켜야 한다는 오래된 직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만을 중심에 놓는 윤리가 충분한가라는 새로운 의심이 있다. 우리는 아직 그 사이에 서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정치, 교육, 예술, 노동, 윤리는 그 사이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다시 쓰게 될 것이다.
- Walter Isaacson, 『Elon Musk』 발췌 기사, “Inside Elon Musk’s Struggle for the Future of AI”, TIME. https://time.com/6310076/elon-musk-ai-walter-isaacson-biography/
- Musk v. Altman/OpenAI 소장 PDF, Courthouse News. https://www.courthousenews.com/wp-content/uploads/2024/02/musk-v-altman-openai-complaint-sf.pdf
- “Key takeaways from Musk’s testimony at OpenAI trial”, Reuters. https://www.reuters.com/sustainability/boards-policy-regulation/key-takeaways-musks-testimony-openai-trial-2026-05-01/
- OpenAI, “Introducing OpenAI”. https://openai.com/index/introducing-openai/
- Future of Life Institute, “Pause Giant AI Experiments: An Open Letter”. https://futureoflife.org/open-letter/pause-giant-ai-experiments/
- Center for AI Safety, “Statement on AI Risk”. https://www.safe.ai/work/statement-on-ai-risk
- Britannica, “Speciesism”. https://www.britannica.com/topic/speciesism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Moral Status of Animal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moral-animal/
- Patrick Butlin et al., “Consciousness in Artificial Intelligence: Insights from the Science of Consciousness”. https://arxiv.org/abs/2308.08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