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이야기를 모른다 (5)
나는 2015년부터 기계에게 이야기를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엔씨소프트에서 8년, 지금은 KT 미디어본부에서. 직함과 회사는 바뀌었지만 붙들고 있는 질문은 같다. AI는 정말 이야기를 아는 걸까.
AI가 글을 척척 써주는 시대가 됐지만, “그럴듯한 글”과 “좋은 이야기”는 다른 말이다. 그 차이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며 10년을 보냈다. 이 연재는 그 시도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의 기록이다.
이 칼럼은 룰베이스 시대의 실험부터 LLM 등장 이후까지를 다룬다. AI 글쓰기 도구를 쓰면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 있다면, 혹은 창작과 기술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면, 이 기록이 그 감각에 말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분야별로 잘나가는 유튜브 채널을 모아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다. AI에게 '좋은 썸네일'을 학습시키려면, 무엇이 좋은 썸네일인지 인간이 먼저 규칙으로 정의해 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함께 일하던 연구원들이 내게 요구한 것은 명확했다. 무엇이 좋은 썸네일인지 항목별로 쪼개고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이른바 정량화된 '평가 기준'이었다.
이를테면 '썸네일 문구는 14자 이내여야 한다'는 가이드가 있다면, 그 기준을 점수에 어떻게 반영할지 수식으로 적어 달라는 식이었다. '좋음'이라는 감각을 아주 미세한 단위의 규칙으로 파편화해 달라는 요구였다.
나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클릭률이 높은 썸네일은 문구가 정확히 14자여서 터진 게 아니다. 14자일 때 성공할 확률이 조금 더 높을 뿐, 실제로는 영상이 업로드된 시점의 시의성, 채널 고유의 정체성, 그날의 알고리즘과 화제성 같은 유기적인 맥락이 전부 얽혀 작용한 결과다.
그럼에도 프로젝트는 진행되었고, 수백 개의 영상에서 공통된 패턴을 뽑아 데이터로 정리했다. '얼굴은 크게, 글자는 짧게, 색상은 빨강 아니면 노랑.'
결론은 분명했다. 좋은 썸네일에서 사후적으로 규칙을 추출해 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 규칙을 강박적으로 다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썸네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 기묘한 어긋남을 매끄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AI에게 있던 게 아니라, '평가한다'는 행위의 무게를 우리가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좋은 이야기를 가려내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깨달으려면, 인류가 그동안 그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누구나 아는 고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예로 들어보자. 아버지를 잃은 왕자가 삼촌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정작 칼을 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망설인다.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독백은 바로 이 지독한 망설임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다.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을 '좋다'고 평가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어떤 평론가는 오직 작품의 내부에만 침잠한다. 작가가 누구인지, 어느 시대에 쓰였는지는 일부러 지워둔 채 대사의 언어와 극의 구조가 얼마나 정교한가만을 따진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한 구절이 품은 운율과 팽팽한 긴장감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된다는 입장이다. 문학사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형식주의, 혹은 신비평이라 부른다.
반면 어떤 평론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셰익스피어가 숨 쉬던 당대의 시대상, 유행하던 복수극의 전통, 죽음과 왕권을 둘러싼 시대적 관념을 배제한 「햄릿」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텍스트는 결국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시선, 이것이 바로 역사주의와 전기비평의 관점이다.
또 다른 평론가는 독자의 마음을 읽는다. 햄릿의 망설임은 누군가에겐 답답한 우유부단함으로, 누군가에겐 삶과 죽음을 통찰하는 깊은 사유로 다가간다. 같은 독백이라도 읽는 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는 셈이다. 의미는 텍스트에 박제되어 있는 게 아니라 독자의 수용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이 입장은 '독자반응이론'이라 불린다.
여기서 핵심은, 이 다양한 관점들이 사이좋게 하나의 공식으로 합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쪽이 극찬한 정교한 형식을 다른 쪽에선 시대를 외면한 공허한 기교라 깎아내릴 수 있고, 독자를 뒤흔든 감동을 또 다른 쪽에선 설익은 감상주의라 밀어낼 수 있다. '좋은 작품'을 판정하는 단 하나의 객관적 잣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음'의 정의 자체가 관점에 따라 치열하게 충돌한다.
그래서 좋은 평가자는 결코 하나의 잣대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여러 관점을 입체적으로 품은 채, 이 작품에는 어떤 렌즈가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매 순간 새로 가늠한다. 그 가늠은 수학 공식이 아니라 오랜 읽기와 사유로 다듬어진 '직관'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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