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더 심했어

조언을 빙자한 텃세들 I

by왕고래


포악하기로 유명한 팀에 배치되어 멘탈이 영화 속 유리창처럼 잘게 조각난 적이 있다.


굵직한 돌을 삼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선임 대리가 날 호출하더니 물었다. 일은 좀 할 만하냐고.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보탬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모범 답안지를 냈다. 그는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사실 그 맹수만 득실거리는 부서에서 그는 유일하게 염소 같은 초식동물이었다. 생긴 것도.


맹수들의 표적이 되어 유독 많은 살점이 뜯겨나갔던 날, 삼키던 돌이 턱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염소 대리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참고 있던 어려움들을 솔직히 털어놨다.


알려준 적이 없는데 왜 타박부터 하는지 모르겠다고, 담배 심부름까진 참겠는데 왜 내 돈으로 사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출근하지도 않은 사람이 왜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이 돼야 하며, 그 거짓이 들통났을 때 화살을 맞는 사람이 왜 나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 시대의 문제들에 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들어줬다. 조금은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유명해서 식상하기까지 한) 그 말을 뱉었다.


“나 때는, 더 심했어. 지금은 진짜 많이 좋아진 거야. 잘 참아봐.”


그는 자신의 말이 흡족했는지 얼굴 사방에 주름이 파이도록 웃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을 감싸던 온기가 깡그리 사라졌다. 목구멍을 아슬아슬 통과하던 돌덩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때는'이라는 표현이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은 비교로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들 사이에서만 고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제대로 걸려본 적 없는 사람에게 환절기 기관지염은 일상을 무력화하는 재해다. 축 처지는 몸을 어찌할 바 모르겠고, 잦은 기침에 난생처음 복근이 생길 지경이다.


이 사람에게 내가 겪었던 살인적인 몸살 이야기를 아무리 생생하게 들려줘도, 당장 기침할 때마다 찢어지는 목젖의 고통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더 심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금 이 고통을 줄여주지는 않는다.


'나 때는'은 그런 말이다. 내 고통이 네 것보다 더 크다는 선언. 그러니 네 것은 고통이라 부르기 민망하다는 암시. 말하는 사람은 위로를 건넸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은 자신의 어려움이 이 자리에서 발 디딜 곳을 잃었다고 느낀다. 마치 텃세를 당하는 것처럼.


텃세: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 의식


사실 이 표현은 이미 꽤 유명해졌다. 그래서 낱말 그대로 쓰는 사람은 줄었다. 하지만 단어만 바꾸고 같은 의도를 담은 표현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작년까지는 엉망이어서 제가 참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좋아졌죠."


신규 프로젝트를 맡은 팀원이 어려움을 털어놨을 때 팀장이 한 말이다. '나 때는'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같다. 내가 겪는 어려움의 가치가 희미해지는 느낌.


말하는 입장에서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분명 경험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자신의 고통을 부정당했다고 느낄 수 있다. 선의가 상처가 되는 방식은 대개 이렇게 조용하다.



물론 누군가의 그 ‘나 때는’에서 지금의 문제를 푸는 힌트를 얻을 때도 있다. 딱히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


다만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타인의 고통이 내 것의 크기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 더 힘들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내가 더 괜찮아야 한다는 근거가 되진 않는다. 나의 오늘은 그 누구의 과거와도 비교될 수 없다.


그 자체로 고유하고 값지다.



<나 때는>

독성: ★☆☆☆☆
지속성: ★★☆☆☆
습관성: ★★★☆☆

유의어: #그건아무것도아니야 #유난떨지마
연관어: #좋을때다 #그게어려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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