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65/365)
작년 나는 이렇게 썼다. 기술 격변 속에서도 PM에게는 일곱 가지 불변의 핵심 역량이 있으며, 특히 AI 시대에는 윤리적 바카라임감이 전례 없는 무게를 지닌다고. 지금 돌아보면, 그 글은 옳았다. 그러나 동시에 충분하지 않았다.
‘불변의 역량’이라는 프레임은 깔끔하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 깔끔함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역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만, 현장의 PM에게 진짜로 질문되는 것은 ‘나는 지금 누구로서 행동하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일곱 가지 역량(문제 정의, 전략, 공감, 데이터, 소통, 실행, 윤리)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시대를 관통하는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역량이라도 시대에 따라 그 작동 방식과 무게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용자 공감’은 PC 시대에 UI/UX 관찰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인간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적 편향과 알고리즘 불신의 심리까지 읽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은 이제 명확한 수치 대신 확률, 불확실성, 편향 지표, 비용-성능 트레이드오프 같은 복잡한 다차원 데이터를 해석하는 일이다.
‘소통과 협업’은 더 이상 기획-개발-디자인 간의 조율이 아니라, 데이터 과학자, ML 엔지니어, 법무, 윤리위원회, 그리고 때로는 AI 모델 자체를 하나의 ‘이해관계자’로 포함하는 초역학적 중재로 변했다.
표면의 명사는 같아도, 동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변의 역량’이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 의미를 잃었다.
경험으로 쌓아야 하는 지식은 이제 토큰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내가 수많은 실패와 야근을 통해 몸으로 익힌 ‘암묵지’가 단순히 학습된 토큰의 배열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은, 마치 내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곱씹을수록, 이 주장이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LLM은 이미 ‘과거에 기록된 모든 PM 사례’를 학습할 수 있다. 어떤 기능을 어떻게 출시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왔는지, 어떤 트레이드오프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그 패턴을 압축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내가 10년 걸려 쌓은 ‘경험의 패턴 인식’을, AI는 몇 초 만에 토큰 확률로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PM의 경험은 무의미해지는가?
아니다. 단지 ‘기록 가능한 경험’과 ‘기록 불가능한 경험’의 경계가 분명해졌을 뿐이다.
토큰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사례에서 일반화 가능한 패턴’이다. 하지만 PM이 매일 마주하는 진짜 난제는 패턴에 맞지 않는 예외, 조직의 숨겨진 감정 이력, 그리고 ‘아무도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상황’에서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의 A팀과 B팀이 오래된 감정적 갈등을 안고 있을 때, 그 갈등의 역사는 어디에도 문서화되어 있지 않다. 설사 있다 해도, 그 미묘한 뉘앙스와 신뢰의 잔재는 토큰이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몸으로 부딪히며 읽어내는 ‘관계의 지문’에 가깝다.
결국, AI는 PM의 ‘정보 처리 노동’을 대체하지만, PM의 ‘존재적 바카라임’은 대체하지 못한다.
작년 글에서 나는 AI 시대 PM의 윤리적 바카라임감을 강조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모든 PM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 소양’처럼 말했다. 그러나 윤리적인 바카라임을 가지는 것이 자신의 타이틀이 될 수도 있다 .
이 표현은 정확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이틀이 되어가는 중’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윤리적 결정은 대부분 ‘단기 수익’이나 ‘출시 속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편향을 완화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와 정제 비용이 든다. 투명성을 높이려면 모델 성능을 일부 희생해야 한다. 안전장치를 강화하면 사용자 경험이 둔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적 원칙을 고수하는 PM은 드물다. 대부분은 “경쟁사는 하는데 우리만 너무 보수적이면 안 된다”는 압박에, 혹은 “다음 분기 MAU 목표”라는 숫자 앞에 무릎 꿇는다.
따라서 ‘윤리적 바카라임을 지는 PM’은 더 이상 기본값이 아니라, 특별한 타이틀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그 소수는 그 행위 자체로 시장에서 구별된다.
물론 위험도 있다. ‘윤리 워싱(Ethics Washing)’이다. 마케팅 문구로 윤리를 내세우지만, 실제 불편한 결정(수익 포기, 출시 지연) 앞에서는 뒷걸음질치는 것. 그런 점에서 이 타이틀은 ‘주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트레이드오프의 순간마다 증명되는 것이다.
작년 글에서 나는 PM의 역할을 ‘비전 제시자’, ‘전략가’, ‘사용자 대변인’ 등으로 묘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오늘 나는 더 간결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싶다.PM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람과 AI,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중재하는 사람이다.
이 정의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 사람들 사이의 중재
기획, 개발, 디자인, 마케팅, 영업, 법무, 리걸, 정바카라팀. 이들 각자는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고, 다른 KPI에 움직인다. PM은 이들 사이에서 공통의 의미를 창조하는 ‘통역사’이자, 갈등을 ‘생산적 긴장’으로 전환하는 ‘촉진자’다.
둘째, 사람과 AI 사이의 중재
AI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AI는 추천을 하고, 결정을 대신하며, 심지어 사용자를 대신해 행동하는 ‘Agent’가 되었다. PM은 이제 AI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지는 않지만, AI의 행동 패턴과 결과를 이해하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해야 한다.
이는 “AI가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 인간 팀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일상적으로 던지는 일이다. AI는 대화 상대는 아니지만, 그 출력물은 하나의 ‘의견’처럼 기능한다. PM은 그 의견을 맹신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결정을 이끌어내야 한다.
셋째, AI와 비즈니스/윤리 사이의 중재
모델의 성능, 비용, 지연 시간, 편향, 안전성, 규제 대응. 이 모든 요소는 때로 상충된다. PM은 기술팀이 말하는 ‘이 모델의 F1 점수’와 비즈니스팀이 말하는 ‘전환율’과, 윤리위원회가 말하는 ‘공정성 지표’를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선순위 정리가 아니다. 각 영역의 언어를 번역하고, 트레이드오프의 본질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그럼에도 ‘왜 이 선택을 했는지’를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일이다.
직무 명세서에 적힌 ‘바카라임과 자격요건’은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채용하고 평가하기 위해 만든 편의적 구성물이다. 하지만 PM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리스트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하는 자아가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의 문제다.
나는 이 질문을 내게 던져보았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
나는 사용자가 자신도 몰랐던 가능성을 마주하는 순간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이 목적 의식은 KPI로 환원되지 않는다. ‘가능성을 마주한 횟수’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없으면, 단기 숫자에 휩쓸려 방향을 잃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결정이 당장의 MAU는 올리지만 사용자의 자아 존중감을 조금씩 침식한다면, 나는 그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반대로, 당장의 수익은 없지만 어떤 사용자가 “이 제품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로 간다.
이것은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회사 내에서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태도’ 없이 PM을 계속할 자신이 없다.
우리는 결국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고. 제품에 대한 자신의 태도,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도는 메뉴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의 방식이다. 매일 아침 “지금 내가 하는 이 결정은, 내가 믿는 ‘좋은 제품’의 방향과 일치하는가?”라고 묻는 일.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PM이다.
작년 글에서 나는 ‘앞으로 PM에게 필요한 것’을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했다. 지금 나는 그런 확신이 조금 덜하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PM이라는 역할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다. 제품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완전히 예측 가능하지도, 완전히 최적화 가능하지도 않다.
그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때로는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존재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일. 그 일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AI는 그저 그가 사용하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왜 이 제품을 만드는가’에 대한 답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PM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불변의 역량’을 연마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매일 매 순간 “지금 내가 중재하고 있는 이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 그것이 나의 존재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