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236/365)
냉소의 시대, 창작자가 가야 할 방향 과 극혐이라는 마취 에 이어서
며칠 전 단톡방에 "극혐"이라 쳤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고 나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그 정도로 싫었나. 대답은 아니었다. 조금 낯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화면 앞에서 나는 가장 센 단어부터 골라 눌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인터넷 댓글창, 소셜 미디어 피드, 심지어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씩 무언가를 극도로 혐오한다고 선언한다. 원래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인류가 뱀이나 썩은 음식 같은 치명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진화시킨 생존 나침반이었다. 생존에 직결된 것, 즉 내 몸을 해칠 수 있는 것에 한정된 좁은 영역의 경보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협이 현저히 줄어든 지금, 이 비상벨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가.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가 발사된다. 경보는 더 이상 경보가 아니다. 일상의 호흡이 되었다.
이 질문은 곧바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다원주의는 혐오를 필연적으로 가져오는가.
흔한 설명은 기대치다. 슬롯가 도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깨끗해질수록, 사람들은 흰 종이 위의 작은 얼룩 하나조차 견디지 못하게 된다.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과거에는 일상적 마찰로 넘겼을 사소한 다름조차 참을 수 없는 오염, 즉 혐오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결벽증적 슬롯에서는 타인의 사소한 결점이나 나와 다른 취향도 너그럽게 넘기지 못하고 '극혐'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준이 높아졌다는 말은 우리가 왜 이렇게 자주 발끈하는지는 설명해도, 왜 이렇게까지 세게 말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조금 낯선 것과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 사이엔 원래 넓은 간격이 있어야 한다. 그 간격이 통째로 사라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마찰이 사라진 통로' 때문이다.
대면 상황에서 인간은 상대의 표정, 눈빛, 공기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으며 표현의 수위를 조절한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 전, 상대의 얼굴이 이미 제동을 건다. 그런데 액정 뒤에 숨은 문자 소통에서는 이 제동 장치가 빠진다. 심리학에서 온라인 탈억제 효과라 부르는 현상이다. 타격감 없는 손가락 움직임은 평소라면 속으로 삼켰을 감정마저 자극적인 텍스트로 쉽게 흘려보내게 만든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면 "아, 좀 별로네" 정도로 그쳤을 말이, 마찰 없는 화면 앞에서는 곧장 가장 강한 단어로 튀어나간다. 마찰이 사라진 자리에서 표현은 언제나 실제 감정보다 크게 튀어나온다. 이건 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브레이크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통로를 매일 몇 시간씩 지나다니는 문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심코 뱉은 과격한 언어는 다시 우리의 사고를 옭아맨다. 자기지각 이론이 말하듯, 우리는 감정을 먼저 느끼고 그다음 말을 고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뱉은 말을 보고 나서야 자기 감정을 사후적으로 확정할 때가 많다.
조금 낯설다, 내 취향과 다르다, 살짝 아쉽다—원래는 이 정도의 미약한 불호였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아, 극혐"이라 타이핑하는 순간, 뇌는 그 말을 다시 읽고 "나는 저 대상을 진심으로 혐오하는구나"라며 감정을 재조정한다. 우리는 느끼는 대로 말한다고 믿지만, 실은 말한 대로 다시 느낀다. 비대면이 만든 가벼운 배설이 이렇게 무거운 혐오로 굳는다.
이 오작동이 누적되면 감정 입자도가 무너진다. 당혹스러움, 씁쓸함, 서운함, 피로함처럼 결이 다른 감정들이 전부 '극혐'이라는 크고 거친 단어 아래 짓눌려 납작해진다. 세상은 극호와 극혐, 오직 흑백으로만 갈리고, 그 사이를 채우던 회색 지대의 감정들을 우리는 점점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개인이 무심코 뱉은 '극혐'은 그 사람의 내면을 재조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모여 슬롯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예전에는 '혐오'라는 단어를 꺼내려면 생명을 위협하는 무언가, 혹은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 등 합당한 사유가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혐오'가 정당화된다. 혐오의 인플레이션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인플레이션이 혐오의 실제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진짜 혐오의 표적들은, 범람하는 가벼운 극혐의 농담 속에서 자신들이 겪는 실존적 고통이 사소한 투정으로 희석되는 절망을 경험한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라는 분위기가 그들의 고통을 '과민반응'으로 격하시킨다. 언어의 과잉은 진짜 고통을 무효화하는 장치가 된다.
이 '극혐'의 언어적 관성은 다원주의 슬롯와 만나면서 더 큰 구조적 문제로 직결된다. 다양한 가치, 정체성,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마찰을 품을 수밖에 없다. 마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마찰을 조정할 공론장의 탄력성—대화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려는 인내—이 고갈되었을 때 발생한다.
혐오는 마찰을 조정하는 능력이 실패했을 때 등장하는 대체 회로다. 대화로 풀 수 없다고 판단되면, 상대를 '혐오의 대상'으로 격하시켜 관계 자체를 부정한다. 이는 '극혐'이 '살짝 낯섦'을 집어삼킨 방식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감정의 정밀도를 포기하고, 가장 강력 단어로 대상을 소멸시키는 것.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혐오는 다원주의의 결과물이 아니다. 다원주의가 가져온 '차이의 과잉'을 처리할 정서적·제도적 인프라가 부재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일상의 '극혐'이라는 가벼운 발화는 점차 집단적 혐오로, 제도화된 차별로, 극단적 배제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경로를 품고 있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역사는 반복되지는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단 하루에 홀로코스트를 낳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친 반유대주의적 토양 위에, 경제적 절망과 민족적 굴욕이 결합했고, 혐오는 그 모든 조건들이 하나의 타겟을 향해 집중될 수 있게 해주는 렌즈였다.
혐오 자체가 홀로코스트를 낳은 것이 아니라, 혐오가 제도화되고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받아 일상의 언어와 관행에 스며들었을 때 대량 학살이라는 극단적 결과가 가능해졌다. 혐오가 일상어가 되고, 혐오가 법이 되고, 혐오가 교육과정이 되는 순간, 개인의 도덕적 저항은 무력해진다.
오늘날의 혐오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제도화된 혐오보다는 분산된 혐오, 하나의 표적에 집중되기보다는 다중화된 표적, 중앙 통제된 선전보다는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분노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혐오가 일상화되고, 정당화되며, 끝내 배제의 논리로 굳어지는 근본 메커니즘은 다르지 않다.
방심할 수 없는 지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경제적 불안의 재현, '과학적'인 위장을 통한 혐오의 정당화, 그리고 비대면이 가져온 바카라임의 희석.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를 공유하는 일은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식적 결단보다 훨씬 가볍지만, 그 가벼운 행위들이 축적되어 '혐오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결국 극단적 행위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춘다. 이 치명적인 리듬은 현재에도 울리고 있다.
이 모든 층위를 관통하는 하나의 물음이 남는다. 우리는 왜 이토록 감정의 해상도를 잃어가고 있으며,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혐오의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당장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을 참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더 잘게 쪼개는 훈련이다. 리뷰창에 별점을 매길 때, '극혐'을 치기 전에 한 박자 멈춰 정말 낯선 건지, 기대에 못 미친 건지, 그냥 내 취향이 아닌 건지를 구분해본다. 단톡방에서 누군가의 말에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일 때는, 보내기 전에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이 말을 할 수 있을까—이 질문 하나가 사라진 마찰을 대신 세워준다.
정말 강한 단어는 아껴두어야 한다. 부당한 폭력이나 착취 앞에서 쓸 말을, 살짝 낯선 반찬이나 취향에 안 맞는 영화에 미리 다 써버리지 말자. 언어가 소진될 때, 우리는 진짜로 중요한 것을 표현할 수단을 잃는다. 그날 단톡방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극혐'이 아니라 '좀 낯서네'였다. 그 차이를 그대로 옮겨 적는 느리고 작은 작업이 혐오의 인플레이션을 멈추는 시작점이다.
개인의 언어를 다듬는 것이 내면의 해상도를 지키는 일이라면,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은 창작자의 몫이다. 언어와 서사를 빚어내는 이들의 바카라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이유다.
그렇다면 창작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냉소가 일상의 소비재로 둔갑하고, 혐오가 슬롯적 인프라로 굳어지는 시대에, 창작자는 잃어버린 감정의 해상도를 복원할 바카라무가 있다.
첫째, '완결된 이상향'이 아닌 '불완전한 희망'을 그려야 한다.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갈망하는 인간의 자세를 선명하게 포착해야 한다.
둘째,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이 겪은 '생생한 모순'을 정직하게 그려내어 타자에게 보편적 인간 조건의 뼈대를 건네주어야 한다.
셋째, 자극으로 문을 열고 온기로 문을 닫는 구조를 통해, 냉소에 굳은 감각을 깨우는 질문을 주입해야 한다.
넷째, 혐오가 어떻게 제도화되고 개인이 동조하게 되는지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섬세하게 해부하며, 혐오의 표적이 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얼굴과 디테일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다섯째는, 혐오자가 완전한 타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용기다. 혐오자를 단순한 '악인'으로 그리면 관객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진정 위험한 것은 혐오자가 불안에 떠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떻게 혐오에 빠져들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서사는 관객에게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어떤 혐오를 무심코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을 향해 뱉은 날 선 언어는 결국 가장 먼저 나 자신의 내면부터 찌른다. 냉소는 배신당하지 않으려는 갑옷이지만, 갑옷은 끝내 아무도 안아주지 못한다. '극혐'이라는 과격한 언어는 일시적 배설의 쾌감을 주지만, 결국 감정의 정밀도를 파괴하고 슬롯의 병리로 전이된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말했다. "진정한 적은 나치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무지해지려는 마음이다." 혐오라는 말을 아끼는 일은, 결국 내 감정의 정밀도를 지키는 일이고, 그 정밀도가 모여 더 섬세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현실의 잔혹함에 덤덤한 척 냉소를 두를지라도, 시간의 풍파를 견디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것은 결국 하나다.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하고,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최소한의 믿음. 그리고 그 좁고 험한 길을 끝끝내 열어젖히는, 끈질긴 다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