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212/365)
왜 싫다고 하지 않고 극혐할까? 를 보고
며칠 전 단톡방에 "극혐"이라 쳤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고 나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그 정도로 싫었나. 대답은 아니었다. 조금 낯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화면 앞에서 나는 가장 센 단어부터 골라 눌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인터넷 기사 댓글창, 소셜 미디어 피드, 심지어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씩 무언가를 극도로 혐오한다고 선언한다. 원래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인류가 뱀이나 썩은 음식 같은 치명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진화시킨 생존 나침반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협이 현저히 줄어든 지금, 이 비상벨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가.
흔한 설명은 기대치다. 슬롯가 도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깨끗해질수록, 사람들은 흰 종이 위의 작은 얼룩 하나조차 견디지 못하게 된다. 세탁기가 발명된 뒤 오히려 빨래에 쓰는 시간이 늘었다는 가전 슬롯학의 오래된 관찰과 같은 구조다. 기준이 올라가면 예전엔 그냥 넘어갔을 얼룩이 참을 수 없는 오염이 된다. 결벽증적 슬롯에서는 타인의 사소한 결점이나 나와 다른 취향도 너그럽게 넘기지 못하고 극혐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준이 높아졌다는 말은 우리가 왜 이렇게 자주 발끈하는지는 설명해도, 왜 이렇게까지 세게 말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조금 낯선 것과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 사이엔 원래 넓은 간격이 있어야 한다. 그 간격이 통째로 사라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대면 상황에서 인간은 상대의 표정, 눈빛, 공기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으며 표현의 수위를 조절한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 전, 상대의 얼굴이 이미 제동을 건다. 그런데 액정 뒤에 숨은 문자 소통에서는 이 제동 장치가 빠진다. 심리학에서 온라인 탈억제 효과라 부르는 현상이다. 타격감 없는 손가락 움직임은 평소라면 속으로 삼켰을 감정마저 자극적인 텍스트로 쉽게 흘려보내게 만든다.
예전에 나는 추천 알고리즘이 선택의 마찰을 지운다고, 그리고 그 마찰이 사라지면 내가 골랐다는 감각도 함께 옅어진다고 적은 적이 있다. 여기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다만 지워지는 건 선택의 무게가 아니라 표현의 브레이크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면 "아, 좀 별로네" 정도로 그쳤을 말이, 마찰 없는 화면 앞에서는 곧장 가장 강한 단어로 튀어나간다.
마찰이 사라진 자리에서 표현은 언제나 실제 감정보다 크게 튀어나온다.
이건 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브레이크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통로를 매일 몇 시간씩 지나다니는 문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심코 뱉은 과격한 언어는 다시 우리의 사고를 옭아맨다.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강한 버전은 학계에서 기각됐지만, 언어와 사고가 서로 되먹임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내면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지각 이론이 말하는 게 이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먼저 느끼고 그다음 말을 고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뱉은 말을 보고 나서야 자기 감정을 사후적으로 확정할 때가 많다.
조금 낯설다, 내 취향과 다르다, 살짝 아쉽다 — 원래는 이 정도의 미약한 불호였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아, 극혐"이라 타이핑하는 순간, 뇌는 그 말을 다시 읽고 "나는 저 대상을 진심으로 혐오하는구나"라며 감정을 재조정한다.
우리는 느끼는 대로 말한다고 믿지만, 실은 말한 대로 다시 느낀다.
비대면이 만든 가벼운 배설이 이렇게 무거운 혐오로 굳는다. 내면화의 악순환이다.
여기서 하나 구분해야 한다. 뱀을 보고 뒷걸음치는 혐오와, 채팅창에 "극혐"을 치는 혐오는 겉보기엔 같은 단어를 쓰지만 다른 종류의 신호다. 진짜 혐오는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몸에 남는다. 심장이 뛰고, 그 근처에 다시 가고 싶지 않고, 냄새만 스쳐도 반응이 돌아온다. 습관성 극혐은 타이핑을 마치는 순간 이미 휘발된다. 정작 그 대상 앞에 다시 서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때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휘발된 감정이 뇌에는 여전히 "나는 혐오했다"는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몸에는 남지 않았는데 언어에는 남는다. 그래서 이 둘을 가르는 질문은 하나다. 이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몸이 기억하는가, 아니면 화면을 끄는 순간 이미 다 지나간 감정인가. 후자라면 그건 혐오가 아니라 언어적 관성이 오작동한 것이다.
이 오작동이 누적되면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이 말하는 감정 입자도가 무너진다. 당혹스러움, 씁쓸함, 서운함, 피로함처럼 결이 다른 감정들이 전부 극혐이라는 크고 거친 단어 아래 짓눌려 납작해진다. 세상은 극호와 극혐, 오직 흑백으로만 갈리고, 그 사이를 채우던 회색 지대의 감정들을 우리는 점점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정작 진짜 위협 앞에서 써야 할 가장 강한 단어의 재고도 함께 줄어드는 셈이다.
매일 아무 데나 쓰다 보면, 정말 필요한 순간 꺼낼 말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건 감정을 참는 훈련이 아니라 감정을 더 잘게 쪼개는 훈련이다.
리뷰창에 별점을 매길 때, "극혐"을 치기 전에 한 박자 멈춰 정말 낯선 건지, 기대에 못 미친 건지, 그냥 내 취향이 아닌 건지를 구분해본다. 세 개는 전혀 다른 감정인데 지금까지는 하나의 단어에 몰아넣고 있었다.
단톡방에서 누군가의 말에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일 때는, 보내기 전에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 이 질문 하나가 사라진 마찰을 대신 세워준다.
그리고 정말 강한 단어는 아껴둔다. 부당한 폭력이나 착취 앞에서 쓸 말을, 살짝 낯선 반찬이나 취향에 안 맞는 영화에 미리 다 써버리지 않는다. 언어의 총량은 무한하지 않다.
불안과 피로가 만연한 슬롯에서 혐오의 센서는 쉽게 켜진다. 그 센서의 오작동을 막으려면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함을 그대로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날 단톡방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극혐"이 아니라 "좀 낯서네"였다. 그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
세상을 향해 뱉은 날 선 언어는 결국 가장 먼저 나 자신의 내면부터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