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8일
도둑질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나와 동생은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나는 친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친할머니라는 호칭과 달리 아빠의 친엄마가 아니었던 친할머니는
화투와 담배를 좋아했다
할머니방의 병풍 뒤에 누워서
어린 내가 무심결에 들었던 말과 냄새, 소리가 기억이 난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가 없이 남겨질 어린 자식들을 불쌍해하는 말,
좁은 방에 퍼지는 담배 냄새,
화투패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아이고 쌌네, 광 났네 하는 말들
나는 병풍 뒤에 누워서 잠이 오지 않아도
자는 척을 했다
나에겐 짐가방이 하나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검은색 어른 짐가방
거기엔 내 옷가지가 들어있었다
짐가방이 놓인 할머니 화장대 근처에는
할머니가 즐겨바르는 초록색 통의 분홍 루즈가 있었다
나는 엄마도 그 루즈를 바르면 예쁘겠다며,
할머니 몰래 짐가방에 루즈를 넣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내 짐가방에 있던 루즈는
다시 화장대에 올라와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혼자 짜증을 내며
루즈를 다시 내 짐가방에 넣었고,
이상하게도 나중에 다시 루즈가 화장대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결국 그 루즈를 엄마에게 주지 못했다
나의 짐가방은 나와 함께 할머니집에 남았고,
나의 첫 도둑질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