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좋은 이유는 '쉼'이 아니라 '자율'입니다

- 교사가 방학이라고 쉬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bySunny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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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시작되면 꼭 듣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방학이 있어서 좋겠어요."

38년 동안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조금 서운했지만 지금은 그냥 웃습니다. 좋은 게 맞으니까요. 다만 좋은 이유가 조금 다를 뿐입니다.


방학은 원래 날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방학의 출발점은 교육철학이 아니라 기후였습니다. 가장 덥고 가장 추운 때, 아이들을 교실에 오래 붙잡아 두지 않으려는 오래된 지혜지요.

물론 요즘은 사정이 다릅니다. 교실마다 에어컨이 있고, 틀어 놓으면 한여름에도 수업은 됩니다. 그래서 "이제 방학이 왜 그렇게 길어야 하나" 하는 말도 나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다만 냉방이 된다고 배움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한여름 5교시, 눈은 뜨고 있지만 생각은 이미 창밖에 나가 있는 얼굴들. 온도는 낮출 수 있어도, 계절이 몸에 새겨 놓은 리듬까지 낮출 수는 없습니다.


학기 중의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학기 중 우리는 잘게 쪼개진 시간을 삽니다. 초등학교는 40분, 중학교는 45분, 고등학교는 50분. 학교급마다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종이 울리면 시작하고 종이 울리면 멈추는 삶.

그 리듬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 리듬만 계속되면 3월의 첫 수업은 결코 새로울 수 없습니다. 작년의 나를 복사해서 붙여넣게 됩니다.

교사에게 방학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쉬어야 해서가 아니라, 다시 새로워져야 해서입니다.


좋은 이유는 '쉼'이 아니라 '자율'입니다

방학 중에도 학교는 돌아갑니다. 연수가 있고 업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실을 굳이 해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방학의 가치를 '쉰다'는 데서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기 중의 시간이 남이 짜 놓은 시간표를 따라가는 시간이라면, 방학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하는 비중이 훨씬 커지는 시간입니다. 무엇을, 언제, 얼마나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 교사에게 이보다 귀한 회복은 없습니다.


가장 맑은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가 다툽니다

아침의 가장 맑은 시간. 이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가 자꾸 다투어 다가옵니다. 어떤 날은 모닝 페이지를 펼쳐 마음에 고인 것을 흘려보내고, 어떤 날은 읽다 만 바카라이 먼저 손에 잡히고, 어떤 날은 새벽에 떠오른 문장을 붙들고 원고로 들어갑니다.

늘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다툼이 좋습니다. 무엇을 먼저 할지 스스로 고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방학이 주는 자유니까요. 학기 중에는 그 선택권이 저에게 없습니다. 종이 정해 줍니다.

오후에는 강의를 준비하고, 씽크와이즈로 흩어진 자료를 정리합니다. 쌓인 강의 녹음과 영상, 문서를 Chunk·Havruta·ThinkWise 기준으로 분류하는 일도 방학의 몫입니다.


창작은 방학에 태어납니다

돌아보면 제 창작물의 대부분이 방학에 나왔습니다. CHaT 루틴 시리즈 원고도, 컬러링북 도안도, 유튜브 영상도 그렇습니다.

학기 중에 스쳐 간 생각들, 아이가 툭 던진 말 한마디는 붙잡을 시간이 없어 그냥 흩어집니다. 방학은 그 조각들을 모아 형태로 세우고, 다듬어 세상에 내놓는 계절입니다. 만드는 것보다 다듬어 내놓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돌아봅니다

가장 좋은 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학기 중에는 마음이 있어도 못 합니다. 안부를 물어야지 생각만 하다 학기가 끝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 마음의 여백이 없어서입니다.

방학에는 그 여백이 생깁니다. 그래서 연락하고, 만나러 가고, 힘든 시기를 지나는 분의 이야기를 오래 듣습니다. 오래 돌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립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건 해야겠다' 싶은 일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쁩니다

일도 하고, 창작도 하고, 사람도 돌아봅니다. 방학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찾아서 하느라 사실 학기 중보다 더 바쁩니다.

그런데 즐겁습니다. 내가 고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분량이라도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나를 소모시키고, 내가 골라서 하는 일은 나를 쌓아 올립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네, 좋습니다. 부러워하실 만합니다. 다만 쉬어서만 좋은 게 아니라, 바쁠 것을 내가 고를 수 있어서 좋습니다.

퇴직까지 3년. 이제 방학은 38년의 교실에서 얻은 것들을 후배 교사와 학부모가 꺼내 쓸 수 있는 형태로 남기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교사가 방학이라고 쉬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쉬기도 하고, 그 쉼 안에서 스스로 정한 리듬으로 살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채워진 여름과 겨울이 있어야, 다시 3월의 교실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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