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열지 않는 세상에서 인사를 건네다

bySunny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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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나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상입니다. 식당에 가면 주문 패드가 먼저 손님을 반기고, 카페에 가도 키오스크의 커다란 화면을 마주한 채 손가락으로 대화를 대신하곤 합니다. 편리하고 신속하지만, 어쩐지 일을 마치고 돌아설 때면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쓸쓸함이 고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며 말 한마디 섞을 일이 점점 사라져 가는, 바야흐로 '지독한 외로움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퇴근길, 자동차 계기판에 또다시 주황색 연료 부족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마침 지난번 주유캡을 잃어버렸을 때 여분의 캡을 찾아 손수 꼭 닫아주셨던 그 셀프 주유소가 눈에 들어와, 반가운 마음으로 차를 들이밀었습니다. 오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10만 원어치 주유를 선택했습니다.


기계 화면을 보니, 지난번에는 리터당 1,998원이던 휘발유 가격이 오늘은 1,978원이었습니다. 무려 20원이나 내려가 있었습니다. 고작 20원 내렸을 뿐인데도, 2,000원을 목전에 두고 가슴 졸이던 고물가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서민의 마음은 왠지 큰 선물이라도 받은 듯 조금 말랑해졌습니다.


이번에는 또 주유캡을 잃어버릴까 봐 아예 한 손에 검은색 캡을 꼭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주유기를 잡아 주유구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주유를 시작하는데, 저 멀리서 지난번 제게 주유캡을 챙겨주셨던 친절한 직원분이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자동화된 기계들 사이에서 마주한 사람의 실루엣이 어찌나 반갑던지, 제가 먼저 씽긋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것도 잃어버릴까 봐, 이번엔 이렇게 손에 꼭 들고 주유하고 있어요."


제 말에 아저씨는 단박에 기억이 나셨는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아! 그때 그 주유캡 잃어버리셨던 분이군요!"


제 손에 든 캡과 주유구를 번갈아 보며, 아저씨에게 슬쩍 아쉬운 소리를 건넸습니다.


"처음부터 주유캡이 차체에 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만들어졌으면 잃어버릴 일도 없었을 텐데, 참 아쉬워요."


그러자 아저씨는 주유구를 찬찬히 들여다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손님, 원래는 이 차도 줄이 연결되어 있었던 거예요."


아저씨의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띵해졌습니다. 맞다, 그랬었지. 1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제 발이 되고 가족의 발이 되어주며 저와 동고동락해 온 정든 차였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분명 주유캡을 붙잡아 주던 든든한 줄이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긴 세월 주유구를 여닫는 사이, 저도 모르는 새 그 줄이 닳고 닳아 툭 끊어져 버린 모양이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쳐 온 제 차의 나이와 세월의 흔적을, 주유소 아저씨의 눈길을 통해 비로소 알아챈 것입니다.


아저씨는 주유구 옆에 선 채 "요즘 날씨가 참 좋죠?" 하며 다정하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제가 "정말 그러네요, 요즘 날씨 참 좋아요" 하고 맞장구를 치자, 아저씨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흔들어 보이시며 유쾌하게 덧붙이셨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살기 좋은 나라예요. 맞죠? 음…… 딱 이것만 있으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인데 말이죠. 근데 이게 없네요."


돈을 뜻하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씁쓸하게 웃는 아저씨의 농담에는 고단한 삶의 무게가 묻어 있었지만, 오가는 대화의 온도만큼은 봄날처럼 따스했습니다. 키오스크 화면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람 냄새 나는 정겨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주유를 하고 있는데, 맞은편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그 아는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마주 보며 슬쩍 던지신 한마디가 제 귀에 콕 박혔습니다.


"아이고, 반가워요! 당신하고 이렇게 인사라도 안 하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입 한 번 뻥긋 안 하고 말 한마디도 못 할 때가 많다니까!"


주유기를 잡은 채 그 말을 듣는데, 가슴 한구석이 툭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아저씨의 주 업무는 셀프 주유소에서 기계 조작이 서툰 손님을 돕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곁에서 거드는 일일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셀프 주유가 서툴러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이제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해냅니다. 요즘은 누구나 스스로 기계를 잘 다루니, 굳이 아저씨를 부르거나 먼저 말을 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길 가던 지인에게 소리 높여 반가움을 표하던 아저씨의 모습에서, 온종일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기계음 사이에 홀로 서서 사람의 온기 어린 말 한마디를 그리워했을 지독한 고독이 읽혔습니다. 제가 처음 인사를 건넸을 때 아저씨가 그토록 활짝 웃으며 날씨 이야기를 꺼낸 것도, 어쩌면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 피워낸 간절한 호의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기계가 완벽하게 사람을 대체해 가는 이 편리한 세상이 정작 인간을 얼마나 더 외롭게 만들고 있는지를, 아저씨의 뒷모습이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주유가 끝난 뒤, 손에 들고 있던 주유캡을 꼭 닫고 주유구 문을 닫았습니다.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으려는데, 손바닥에 거뭇거뭇한 검은 가루와 얼룩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유캡을 닫으면서 묻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차 안을 뒤져 다행히 물티슈를 찾아 한 장을 꺼냈습니다. 차 문을 열고 주유구로 가서 주유캡에 묻은 검은 얼룩을 깨끗이 닦아낸 뒤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룸미러를 보니, 어느새 제 뒤로 다음 차량이 주유를 마치고 제가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정한 도시의 속도와 효율에 떠밀려, 일단 주유캡 닦는 일을 멈추고 서둘러 문을 닫은 채 주유소를 빠져나왔습니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운전 틈틈이 손에 묻은 검은 얼룩을 먼저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야, 아까 쓰던 물티슈를 다시 들고 주유구로 향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주유캡을 정성스레 닦는데, 하얀 물티슈 위로 시커먼 얼룩이 줄줄이 배어 나왔습니다.


지난번에는 아저씨가 직접 새것처럼 닦아 닫아주셨기에 제 손바닥이 닿을 일이 없었는데, 그 이후 처음으로 제 손으로 직접 만져보니 투박한 플라스틱에 검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새것이 아니라 주유소 어딘가에 보관 중이던 여분을 제게 챙겨주셨던 그 주유캡. 제 손과 하얀 티슈에 배어난 검은 얼룩은 지난번 아저씨가 베풀어 준 친절의 흔적이자, 기술의 편리함 속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한 노동자의 거친 일상이 남긴 낙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끊어져 버린 그 연결줄처럼, 우리 슬롯에서 점점 끊어져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어제오늘 이틀 동안은 감기몸살 기운이 있었습니다. 매일 들여다보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손주였지만, 행여 이 고약한 감기가 아기에게 옮을까 봐 차마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손주를 보지 못한 이틀이 참 아쉽고도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제 남편은 굳이 부탁이나 청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자상하고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저보다 온라인 게임이 가까워 늘 조금 먼저 퇴근하는 남편은, 손주가 생긴 뒤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퇴근하자마자 자동으로 딸의 집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제 온라인 게임이 더 멀어 집에 닿는 시간이 늘 늦다 보니, 남편은 어제도 오늘도 제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고맙게 남편이 든든하게 아기를 봐주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주유캡을 다 닦고 나니, 문득 아빠에게 잠시 아기를 맡겨두고 한숨 돌리고 있을 딸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할아버지가 아기 봐주고 계시니까, 엄마랑 같이 아파트 주변이라도 잠깐 산바카라하자" 하며 딸을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밖으로 나온 딸과 함께 아파트 단지 산바카라로를 나란히 걸었습니다. 마침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집 안에서 아기만 보느라 바깥 계절이 어떻게 흐르는지 몰랐던 딸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엄마,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진 줄만 알았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참 시원하고 좋네."


딸의 그 말에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 기계음 가득한 세상, 그리고 홀로 갇혀 있던 육아의 방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걸어 나오면,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리터당 20원이 깎여 소소하게 기분 좋았던 퇴근길. 비록 몸은 감기몸살로 조금 지쳐 있었고 손에는 다 닦이지 않은 미세한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지만, 마음만은 가득 충전된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셀프(Self)'와 '자동화'로 흘러가는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말 한마디를 그리워하고, 자상한 남편의 배려에 감사하며, 시원한 바람을 함께 나누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오늘 1,978원의 주유소와 아파트 산바카라로에서 다시금 깊이 배웠습니다. 딸과 나란히 걷는 길, 가슴을 채우는 이 바람은 기계가 만들어낸 그 어떤 바람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아늑하게 우리를 감싸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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