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교직의 봄날 오후, 그 아이들의 이름은 '살아있음'이었다
이번 주부터 점심 루틴을 하나 더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교정을 천천히 걷는 것.
딱히 운동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냥 걷기. 그러나 20분 남짓의 그 걸음이 오늘 오후를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들여 놓았습니다.
트랙 근처 주차장 쪽에서 여학생 무리가 달리기 시합을 하려는데 시작 신호를 해달라고 합니다.
일렬로 나란히 선 아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준비이— 시이작!"
일제히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그 초록빛 뒷모습들이 저 멀리 사라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춰 섰습니다.
이 장면, 저장해두고 싶다.
지나가는 저를 발견한 1학년 남학생 몇 명이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친구들에게 외칩니다.
"야, 90도로 인사해야지!"
그러고는 본인이 먼저 허리를 꺾어 90도로 인사합니다.
웃음이 터졌습니다. 진심 어린 웃음으로 화답해 줬습니다.
누가 가르쳐줬을까. 아니면 스스로 익혔을까.
그 어느 쪽이든,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교정에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봄이 왔다고 말하고 있는 꽃들 앞에서, 타임스탬프 앱으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두었습니다.
이 봄날, 이 교정에서, 이 꽃들이 피었다는 것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어서.
축구하는 아이, 야구공을 던지는 아이, 피구하는 아이.
스탠드에 앉아 구경하며 수다 떠는 아이들.
그 모든 소리들이 뒤섞여 하늘로 올라갑니다.
38년을 교단에 섰지만,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소리니까요.
네 잎 클로버를 찾던 여학생 하나가 갑자기 뛰어왔습니다.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내밀기에, 뭐냐고 물었습니다.
"도토리요. 클로버 찾다가 발견했어요."
별것 아닌 듯 건넨 그 도토리를 받아 들고,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말 없이 건네진 것들이 때로 말보다 깊습니다.
나무 벤치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교복 차림으로, 그냥 드러누워, 눈을 감고.
꾸짖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선생님, 날씨 참 좋다요."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아이는 "오늘은 쌀쌀한데 얼른 하복 입었으면 좋겠어요"라며 소매를 여몄습니다.
저는 그 아이 옆을 잠시 같이 걸었습니다.
학부모 폴리스 어머니 두 분이 연두색 조끼를 입고 빨간 봉을 들고 지나가셨습니다.
"수고가 많으세요."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인사가 오가는 오후.
교정을 한 바퀴 다 돌고 교실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봄이 이렇게 와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아직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합니다.
타임스탬프 앱으로 기록한 교정의 봄꽃 사진들은 저의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점심 루틴 하나를 추가했을 뿐인데, 오후가 달라졌습니다.
당신의 오늘 오후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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