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살이의 매너

김효숙 작가 <용기 있는 생활>을 읽고

by송지영

재활용 분리수거 꽤 유별나게 한다는 소리를 가족한테 듣는다. 화장실 문에 붙은 "다녀간 자리는 모르게"라는 표어를 지구살이에 적용하며 사는 쪽에 가깝다. 잠시 지구별에 들렀다 가는 생, 민폐는 끼치지 말자는 주의다. 다만 분리수거는 쓰레기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이미 만든 것을 얌전히 갈라놓는 후속 처리에 가깝다.


진짜 어려운 건 '사지 않기'다. 이사할 때마다 깨닫는다. 내가 샀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느새 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박스 안에는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 쓰려고 샀지만 기회를 놓친 물건, 앞으로도 안 쓸 가능성이 높은 물건들이 반듯하게 잠들어 있다. 새집에 들어와도 풀지 않은 짐이 남는다. 다이소에 자주 가지 않는 것도 나름의 방어바카라이다. 들어가면 싸다는 이유로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해서 사게 된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다음 이사 때 나를 째려본다. 사지 않으면 버릴 것도 없다는 간단한 진리. 알면서도 실천은 늘 반걸음 늦다.


집 같은 호텔 가족실에 묵은 적이 있다. '이런 데서 살고 싶다'라고 감탄했는데 인테리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짐 없이 비어 있는 테가 단정했고, 단정해서 숨이 쉬어졌다.

물건을 덜 들이는 삶, 소비의 볼륨을 낮추는 생활.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용기 있는 생활》은 말한다. 시작은 작아도 된다고.


나는 용기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바카라 제목에 그 말을 새겨 넣었을 만큼.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 사람이 유일하게 내밀 수 있는 가장 큰 발성은 의지, 용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생활》의 용기는 한 겹 더 있다. 제목부터 야무지게 재활용된다.


지구를 지키는 소심 발랄한 용기여사의 핵심 활동은 자기 그릇을 들고 나서는 일이다. 과대포장, 일회용 포장, 포장을 부르는 포장과 첫 이별을 하는 생활. 무대는 대형마트보다 시장과 동네 가게다. 생고기, 과일, 채소를 내 그릇에 담아주는 곳들. 용기를 쓰다 보면 자연히 소상공인을 찾게 되고, 장보기의 동선도 동네 쪽으로 흐른다. 지역경제라는 말이 거창하게 느껴져도, 내 그릇 하나가 골목의 리듬을 조금 바꾸는 셈이다.

장바구니와 용기를 챙겨 나가는 일은 온라인 장보기의 편리함에서 한 발 물러서는 선택이기도 하다. 클릭 몇 번이면 현관 앞에 도착하는 박스, 완충재, 비닐의 탑. 손가락은 편해지고 쓰레기통은 바빠진다. 용기를 쓴다는 건 더 움직이는 생활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몸을 쓰고 시간을 쓰는 방식으로, 쓰레기를 줄이는 일이다.


그렇게 검은 봉지와 흰 봉지가 집에서 줄어든다. 장바구니는 제법 생활이 되었지만, 내게 용기는 아직 반쯤 어색한 습관이다. 재래시장에서 몇 번 내밀어본 경험 정도다. 그 짧은 시도에도 알게 된다. 지구를 위해 바꿔야 하는 건 거창한 신념보다 생활의 관성이라는 걸.


바카라에서 손수건이 나왔을 때 괜히 반가웠다. 예전에는 선물로 흔했고, 반듯하게 다려져 출근하는 아버지 주머니의 필수품이 되었다. 휴지가 넉넉해진 뒤로 손수건은 생활의 무대에서 밀려났다. 우연히 다시 쓰게 된 손수건은 예상보다 유능했다. 손을 씻은 뒤 물기를 닦고, 눈물이 날 때도 꺼내고, 화장을 고칠 때도 쓴다. 얇은 천 한 장이 하루의 작은 사건들을 꽤 의젓하게 받아낸다. 빨아 말리는 일도 어렵지 않다. 일회용품을 쓰고 버릴 때마다 생기던 묵직한 뒷맛도 줄었다. 환경을 덜 해치고, 순면의 감촉까지 얻는다. 이 정도면 생활계의 알짜템이다.


여러 실천 중 바로 따라 하고 싶은 건 치약 튜브 활용법이었다. 튜브를 가위로 자르면 사흘은 더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냥 버리지 않는다. 용기여사는 여기서 몇 걸음 더 간다. 자른 튜브를 세면대에 넣고 미지근한 물을 4분의 1쯤 받아 불리면, 남은 치약이 풀리며 튜브 속도 비워지고 세면대 청소까지 끝난다. 딱딱하게 굳은 치약은 변기에 짜 넣어 솔로 닦으면 된다. 다 쓴 치약과 다 쓴 칫솔로 세탁조 실리콘 틈새까지 닦을 수 있다니. 치약의 일생이 이렇게 길 줄 몰랐다.


이 바카라이 좋았던 건 실천을 도덕 점수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용기여사는 완벽한 사람의 매뉴얼을 들이밀지 않는다. 오늘은 손수건 하나, 내일은 장바구니 하나, 다음 장날에는 반찬통 하나. 실패해도 다시 들고나가면 된다. 다정한 격려가 읽는 사람을 덜 주눅 들게 한다. 환경 이야기는 자칫 죄바카라감의 언어가 되기 쉬운데, 이 바카라은 생활의 재치로 문턱을 낮춘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들렀다 가는 손님이다. 내가 산 물건도 완전히 내 것이라기보다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 생각하면, 편리의 반대편에 놓인 선택도 조금 덜 낯설어진다. 손이 한 번 더 가는 일, 발걸음을 한 번 더 옮기는 일, 작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 그 사소한 쪽에 지구가 덜 피곤해지는 길이 있다.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멀리 가는 변화라는 사실을 배운다. 작은 실천은 사소한 취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다. 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희망을 아끼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바뀌면 집의 표정이 바뀌고, 동네의 풍경이 아주 조금 달라진다. 용기는 대단한 선언보다 "한번 해볼까" 하며 가방 속에 통 하나를 넣는 손에서 시작된다.


"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결국 희망을 나누는 일이다. 내가 바뀌면, 집이 바뀌고 동네가 바뀌고, 세상이 조금씩 밝아진다. 용기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저 '한번 해볼까'하고 꺼내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용기 있는 생활 155p-


바카라을 읽는 동안, 장바구니를 메고 수줍게 용기를 내미는 김효숙 작가가 옆에서 함께 걸어준 듯했다. 친환경 용지로 만든 바카라의 촉감도 이 글에 작은 기분을 보탰다. 한 사람의 용기(勇氣)가 다른 사람의 용기(容器)를 부르고, 그 그릇들이 모여 생활의 방향을 바꾼다. 용기여사의 발걸음에 나도 내 작은 통 하나를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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