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멀리 걷고 싶다.

by박수경

서울 둘레길을 걸었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집을 나서면 불암산으로 올라가는 산행 초입이 있다. 임신하고 만삭 즈음 이사 왔으니 올라가 볼 수 없었고, 출산하고는 내내 아기 돌보느라, 몸이 아파 엄두도 못 냈다.

봄날이 좋았던 목요일 아침, 막둥이를 어린이집 보내고 무작정 생수 한 병 사서 계획 없이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산바카라하듯 오기보다 등산화에 등산복에 갖추어진 차림으로 마주쳤다.

오르막길을 지나 잘 정비된 계단을 걸어 도착한 운동기구가 즐비한 쉼터 같은 곳에서 공릉동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20년 가까이 닭강정을 파셨던 할아버지를 만났다. 우리 애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컵 강정을 사 먹으니 모르실 리 없다. 나 역시 아기띠 하고 열심히 다녔으니 단골이었다. 늘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일하시느라 마르고 기운 없이 생계에 열중하느라 바쁘셨는데 웃음만큼은 해맑으셨다.


컵에 넉넉하게 꽉꽉 채워 우리 아이들 허기를 채워 주셨던 닭강정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셨다. 영업이 종료된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한동안 그 이후로 닭강정 맛이 변해 맛없다며 우리 애들이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늘 한 번씩 생각났는데 먼저 아는 체를 해 주셨다. 맨날 운동만 하셨다며 허리는 꼿꼿이 펴지시고 피부는 맑아지셔서 할아버지셨는데 젊은이가 되어 계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또 뵙자고 하고 다시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산행이라 힘들었는데 발밑을 보니 흙색으로 변한 작은 애벌레가 기어갔다. 자기 몸의 반절만큼 이동했다가 발은 따라온다. 발이 먼저가 아니라 얼굴이 쑥 이동했다가 발이 또 접히며 따라간다. 느리다.


힘드니까 나도 성큼성큼 말고 한 계단 오르고 다시 한 계단에서 두 발을 딛고 다시 한 계단 올라가야겠다. 그렇게 천천히 두 시간을 걸었다. 한 발이 가면 한 발은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둘레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오르막길이 끝나니 내내 내리막길이었다. 신나게 걸었다. 딱 한 분이 “안녕하세요?”라고, 으레 산을 가다 만나면 인사해 주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니 괜스레 좋았다.


도착하고 나니 내가 잘 알던 다시 그 도시에 도착했다. 계획 없이 가서 내려오는 내내 새길이고 낯선 길이었지만, 미션을 수행한 듯 기쁨에 젖었다.


요즘의 나는 평가가 없다. 보류다. 누구도 어떤 사람도 잘 모르겠다. 사정이 있겠지, 그런가 보다 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애정이 지나치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기대치가 생기니까, 멀리서 응원하는 것도 표현 없이 기도하는 것이 더 큰 애정과 사랑일 수도 있겠구나 알아간다. 그냥 넘어져도 보고만 있는 것이 사랑이라니.


계속 성장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직진만 좋아하는 내가 우회한다. 더디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세만 진다.


산길을 걸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견디는 게 쉽지는 않지만, 걷다 보면 목적지가 보이듯 느리더라도 걸어야지. 계속 걸어도 아무도 안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걷다 보면 낯선 이도 반갑다.


조금 넓게, 멀리 걷고 싶다. 폐활량이 커지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