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 산바카라

가끔은 꿈을 꿈으로 두는 편이 나을지도

by수달씨


우선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것은 맛집 지도도 여행 가이드도 아니다. 맛집 지도가 아닌 이유는 필자가 맛집 혹은 맛/미각/미식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이고, 여행 가이드가 아닌 이유는 유명 관광지, 촘촘하고 유용한 정보, 그럴싸한 포토 스폿도 담겨있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사는 필자에게 동네를 벗어난 산바카라은 일반적인 산바카라의 개념이 아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떠나는 여행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십 분을 달리면 강동구에 도착하게 된다(운 좋으면 짝꿍의 출근 차량을 타고 삼십 분 만에 오기도 한다). 보통은 여기서부터 여행을 시작한다는 기분이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다. 강동에서 5호선 또는 8호선을 타고 시작해 신촌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또 마을버스를 타고 연희동을 찾아간다. 오늘의 목적지는 홍대, 연남, 합정, 망원과 또 다른 서울 서쪽의 핫 플레이스, 연희동이다. 가벼운 산바카라이기에는 접근성이 최악이지만 그런 만큼 숨겨진 보물이 많을까 기대해 본다. 오늘은 어떤 보석들을 발견하게 될까.


지도에 빼곡히 표시해 둔 방문 예정지 중 첫 번째 만난 장소는 <연희정음>. 과거에 활발히 활동했던 건축가가 지었다는 공간을 최근 리모델링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 중인데 마침 그 건축가의 사진전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그리 볼거리가 많지 않은 전시를 관람했다. 공간 자체가 주는 매력이 있기에 이용료로 이쯤 낼 수 있다고 주문을 외며 건물을 둘러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이 길었고 커피를 빨리 수혈해야 해서 수많은 커피숍 중 가장 초입인 <연희 에스프레소 바>에 들어갔다. 안쪽의 편해 보이는 테이블을 이용하려면 얼마 이상 주문해야 한다 해서 좁은 바테이블에 앉았다. 이름답게 에스프레소 메뉴가 시선을 끄는데 메모지에 표시해서 주인장에게 넘기는 주문방식이 독특하다.

실은 메뉴 이름과 설명도 어렵고 자리 선정에도 문턱이 있고 해서(실제로 공간 안에 ‘턱’이 있어서 진입 시에도 조심해야 했다) 약간의 번거로움과 실망을 품은 채로 메뉴를 기다렸는데, 아, 여기 맛있다. 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소와 수제 오렌지 잼이 함께 나와 따로도 먹고 섞어도 먹는데 왜 시그니쳐 메뉴인지 알 것 같다. 번거로왔던 기분은 사라지고 단맛과 쓴맛의 그것들을 아껴 먹었다. 연희동의 보물 하나 발견.


다음은 <폴 앤 폴리나>. 예전에 홍대 앞에 있을 때 스콘이 무척 맛있었던 기억이 있는 작은 빵집인데 연희동으로 옮겼나 보다. 먹는 자리는 없어서 허브빵과 치아바타를 포장했다. 스콘은 오후에 나온대서 아쉽게 패스, 바게트가 유명하지만 턱이 부실한 나는 이것도 패스. 여행과 산바카라 중 가방에 빵을 쟁이는 일은 늘 행복하다. 집에 가서 다음날 여행의 기분을 연장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맛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줄지어 늘어선 소품샵의 향연. 커피와 빵 다음으로 내 여행 혹은 산바카라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바로 소품 구경이다. 문구점과 그릇 가게에서 한참 혼을 빼고, 드디어 한적한 거리를 만났다. 생각해 보니 이 동네는 예전에 이름난(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들이 많이 살았던 주택가였다. 언덕배기를 따라 올라가니 명성답게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그래도 배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밀려드는 상업시설에 지지 않고 동네 풍경을 계속 유지해 주어서 오히려 고맙다는 기분이다.


고요히 걷다 보니 그 끝에 빨간 어닝의 작은 가게가 눈에 밟힌다. 지도 위에 표시해 둔 곳 중, 설마 여기까지 오게 되겠어? 라고 생각했던 그곳이다.

마침 다리 품도 쉬어야겠기에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망설인 이유는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맞는지, 주인장이 혼자 쉬려고 만든 곳이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작은 공간이다. 가게 이름도 ‘환상소설집’이다. 이름답게 뭔가 판타지를 자극한다. 동화바카라과 빈티지 소품들이 전시인지 판매 상품인지 모르게 진열되어 있고, 두어 개 있는 테이블에 앉자 체크무늬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이 어디선가 나타나(?) 메뉴판을 건넨다. 메뉴판은 직접 그리고 쓰고 오려 만든 입체(팝업) 카드 모양이다. 메뉴 이름까지 이게 현실이 맞나 하면서도 그나마 뭔지 알 것 같은 메뉴인 사과차를 주문하니 꼭 동화바카라에 나오는 숲속 오두막에 사는 할머니가 마법으로 끓였을 것 같은 차 한잔과 블루베리 두 알(?), 젤리 두 개(?)가 쟁반에 담겨 나왔다. 한 모금 마시자 역시 꿈이 맞았어... 꿈이니까 이리 맛있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공간이 주는 마법에 취했다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처럼 생긴 젤리를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아, 현실이 맞구나. 여기는 연희동이고 다시 가게들이 즐비한 공간으로 이동.


돌아온 현실감과 함께 급격히 배고파 들른 베트남 음식점. 쌀국수를 먹고, 값을 지불하고 나왔다. (Ai가 만든 것이 분명한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는 오래 앉아있기가 어렵다.)

계속되는 상업시설에 지친 내 눈에 맞은편 공공건물 안의 작은 도서관이 들어왔다. 가방에 커피도 있겠다, 저곳에서 이 글을 마무리해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앉아있기가 어렵다. 밖으로 나와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높다랗고 붉은 담벼락 위로 막 잎사귀를 밀어 올리기 시작하는 철쭉 무리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는 방법은 심긴 위치와 시기도 있지만,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단다. 꽃이 따로 먼저 피면 진달래, 잎이 먼저이거나 꽃과 잎이 동시에 나오면 철쭉이다.*) 제법 훈기가 도는 2월 말의 공기. 벤치에 가방과 점퍼를 던져두고 놀이터를 차지한 아이들을 보며 이곳이 사람 사는 데란 걸 알았다. 알약의 기운이 힘을 잃어가듯 오늘치 환상의 유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자 이제 나의 시간으로 돌아갈 차례다. 남은 것은 빵 몇 조각과 끝내 사지 못한 소품과 기념품들, 건강앱에 찍힌 만보의 기록. 나는 이제 돌아가지만 다른 계절에 다른 꿈을 품은 다른 내가 되어 다시 찾아오겠다고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혼자 약속한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해본다. 낯선 곳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역시나 '00와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00가 이걸 좋아할텐데' '00에게 이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집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라는 뻔한 말처럼, 혼자인 시간 동안 간절히 누군가를 떠올린다. 결국 또 혼자 올 거면서. 다음에도 다다음에도 혼자일 거면서. 그러니까 이것은 깨지 않는, 끝내 놓지 않는 환상이다. 다음에는 함께여야지. 사람 속에 들어가야지. 언젠가는,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오롯이 나와 싸우는 중이다. 그래도 그런 나와 꽤 많이 친해졌다.



+ 사러가쇼핑센터 1층에서 눈 돌아갔고 2층 옵젵상가에서 사진 백장 찍었다.

+ 꼭 와보고 싶던 연희동이었는데 결국 와서 봤다. 너무 좋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환상이 하나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서글퍼졌다. 가끔은 꿈을 꿈으로 두는 편이 더 좋을 때가 있다.



* 집에 와서 먹은 허브빵은 당장 다시 연희동으로 달려가고 싶은 맛이었다. 왜 하나만 사 왔니 나 자신을 질바카라하며.

** 김신지, <제철 행복> 참고.



<연희정음> 공간.


한적한 연희동 골목길.



<환상소설집>에서 환상에 취하다.


놀이터와 아이.


산바카라 기억 연장하기.


* 이 글은 2월 하순 무렵에 쓰였습니다.

** 신간이 나왔습니다. 수달씨 작가의 세 번째 독립출판 에세이집 <잘할 필요 없고 그런대로 잘하고 있고>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인스타그램 참고.(@sudal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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