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조건, '괴벽'

누구나 거장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거장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창작자는 거장을 꿈꾼다. 하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창작자는 드물다. 거장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거장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명실공히 우리 시대의 거장, 이창동을 통해 거장의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가능한 사랑』의 원래 이야기는 10여 년 전에 다른 영화로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를 준비하다가 마지막에 말하자면 엎었는데요. … 마지막에 왜 못했냐 하면, 제가 영화를 하기 전에 항상 ‘제가 이 영화를 꼭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저 자신에게도 관객에게도 영화 그 자체로 할만한 의미가 있겠다는 확신이 들지 못하면 영화를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는 일종의 괴벽이라 그럴까요? 그런 게 좀 있는 편인데,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 해고 노동자의 삶을 정직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도 있는데 그것을 굳이 극영화로 만들어서 해야 어떤 이유가 있을까? 라는 거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엎었습니다.” 『가능한 사랑』 제작 발표회에서


거장의 조건은 ‘괴벽이’다. 이창동은 ‘괴벽’이 있다. 이는 자신이 하려는 작품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인지에 확신이 들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더라도 작품을 멈춰 세우는 괴상한 버릇이다. 이는 괴벽이라 할만하다. 창작을 하다보면, 상황과 조건 때문에 관성처럼 창작을 이어나가게 되는 일은 흔하다. 자신의 생계나 야망 혹은 함께 창작했던 이들과의 관계 문제 때문에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에 확신이 들지 않게 되더라도 진행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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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장에게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왜 이창동은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배우들 캐스팅까지 끝난 작품을 엎었을까? 자신이 하려는 해고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정직하게 다룬 다큐멘터리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흔한 창작자들에게 작품을 엎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본적 창작자는 작품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정당화하고, 유능한 창작자는 자신이 그 다큐멘터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장이 될 수 없다.


이창동의 ‘괴벽’은 어디서 왔을까? 염치다. 한 인간으로서의 염치.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표현한 창작자(이들은 잠재적 거장이라 말할 수 있다.)들은 타자의 이야기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때 거장의 문턱에 선 창작자는 하나의 고뇌에 빠지게 된다. 타자의 이야기를 하려는 마음이 ‘사랑’인지 ‘이용’인지 계속 되묻게 되는 것이다. 그 집요한 그리고 지독한 물음이 바로 거장의 조건이다.


이창동은 『가능한 사랑』을 위해 10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해고 노동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려는 자신의 마음이 인간을 ‘사랑’하려는 마음인지 아니면, 그 해고 노동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마음인지를 집요하고 지독하게 확인해 보는 시간이었을 테다. 이는 염치다. 한 인간으로서의 염치.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사적 욕망(자본, 야심, 관계)을 위해 이용하지 않겠다는 염치. 염치는 기다림을 낳는다. 그래서 거장은 기다림 속에서만 탄생한다.


나에게도 10년의 시간이 필요할까? 죽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염치를 지키고 싶다. 죽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인지, 나의 이야기를 위해 ‘이용’하려는 마음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거장은 되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싸구려는 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으로서 내 나름의 ‘괴벽’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염치를 아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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