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꽝스럽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의해 인도된다. 이런 자질이 없는 진정한 혁명가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체 게바라
종종 인문주의자들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본다. 인문주의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보며 분개하고, 5.18 광주항쟁, 제주 43사건, 세월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자이다. 인문주의자는 세계의 고통에 반응하는 자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문주의자를 표방하는 이들은 왜 세계의 고통에 반응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옳은 일이고, 또 세계의 고통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들은 왜 세계의 고통에 반응하는 일을 옳은 일로 여기게 되었고, 또 세계 고통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었을까?
세계는 ‘나(1인칭)’와 ‘너(2인칭)’와 ‘그(3인칭)’의 세계이다. 인문주의자는 ‘나’의 고통에 직면했던 힘으로 ‘너’와 그리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자이다.
여기서 인문주의자들의 길이 갈린다. ‘나’의 고통에 직면하지 않고, ‘너’와 그리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자들이 있다. 일부 상담가들이 그런 부류일 테다. 이들은 무례하고 유해하다. 이들이 ‘너’와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볼 자신이 없어서 ‘너’와 ‘그’의 고통을 ‘관음’하려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의 고통을 관음하며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회피한다. 이는 얼마나 무례하며 또 유해한 일인가.
인문주의자 중 ‘나’의 고통에 직면하고 ‘너’와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다음 길로 들어선다. 이들은 ‘나’의 고통에 직면했기에 ‘너’의 고통을 관음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너’의 고통에 반응하게 된다. 이들은 이제 하나의 시험대 오른다. ‘너’의 고통에 (‘관음’이 아닌) ‘반응’했기에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된다. 그 고통은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육화된 고통일 수도 있고, ‘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나’의 조언에 반응하지 않는 ‘너’를 보며 느끼는 짜증스러움이나 답답함일 수도 있다.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이들 중에 ‘너’의 고통은 외면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이들은 흔하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너’의 고통에 대한 반응은 너무 쉽게 ‘나’의 고통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연인·친구의 고통에 반응하는 일은 너무나 괴로운 일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안전한 혹은 편안한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쪽으로 쉽게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너’의 고통에 반응하는 시간에 충분히 머물러야 한다. ‘너’의 고통이 ‘나’에게 전해져 온몸에 발진이 일어나고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나약하고 비겁하게 너무 쉽게 ‘그’의 고통에 반응하는 쪽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언제 ‘그’의 고통에 반응해야 할까? ‘그’가 ‘너’가 될 때이다. 그것은 반응하는 일이 아니라, 반응되는 일일 테지. ‘너’의 고통에 반응하는 고통의 시간이 충분히 보낸 이들만이 ‘그’의 고통에 반응될 수 있다.
진정한 인문주의자가 되려면,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는 ‘너’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너’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쉽게 ‘그’의 고통으로 옮겨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를 건너뛴 ‘너’의 세계가 무례한 폭력의 세계라면, ‘너’를 건너뛴 ‘그’의 세계는 기만적 허무의 세계일 뿐이다.
인문주의자는 세계를 더 아름답게 바꾸려는 자이다.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려는 자는 반드시 고통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가장 먼저 ‘나’의 고통에 직면하고, 그다음 ‘너’의 고통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한동안 그 ‘너’의 고통에 머물러야 한다. 수많은 ‘그’들이 바로 그 ‘너’가 될 때까지. 혁명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나는 혁명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