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블랜딩 티백을 쫒는 모험

이름도 브랜드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미묘한 감각만 주위를 맴돌 뿐.

bystephanette

아주 긴 이야기다.

그 시작은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커피에 빠져 있던 나는 '카페뮤제오'를 자주 들락거렸다. 내게 커피용품의 놀라운 세계를 알려주던 온라인 쇼핑몰이다. 여름에는 냉침차를 마신다. 그때라고 별 다를 것은 없다. 그래서 레몬블랜딩 티백을 한 박스 주문했다. 당시로서도 매우 비싸게 주고 샀었고, 정말 아끼고 또 아껴서 마셨다.

내가 가진 바카라들의 대부분의 바카라갈피는 레몬블랜딩 티백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가끔 티백의 봉투를 코에 대고 향을 맡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잊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잊지 않기 위해서 바카라갈피로 고이고이 간직했으나

그 바카라들도 다 처분한 지 오래다.


커피를 줄이고 차를 마시던 차에

불현듯 그 생각이 났다.


차의 이름도

제품 브랜드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연노랑색이고

정말 화려한 향이었다는 것만 떠오른다.


"어떻게 찾지?"

다시 마시고 싶다.

카페뮤제오에 연락을 해서 20년 전의 그 제품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그 레본블랜딩 티의 향과 비슷할 것만 같은 차를 찾아보았다.


셀레셜시즈닝스 셀레스티얼 티 시나몬 애플 스파이스

20 티백 1박스. 9천 원선.


이 브랜드는 종이 박스 안에

밀랍으로 코팅한 종이봉투가 한 겹 더 있다.

미끌거리면서도 반광택을 만지듯이 특이한 촉감이다.

표면 촉감은 빳빳한데 봉투를 여는 느낌은 유연하다. 종이보다 더 천천히 움직인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 된다. 얇은 초를 만지는 느낌이다.

아, 밀랍이 아니라 왁스 코팅지다.

봉투의 입구는 닫혀 있지만 쉽게 열린다. 그리고 닫으면 밀봉하듯이 닫힌다.


이상하다.

특이하고도 왠지 고급스럽다. 향을 꽉 묶어버리겠다는 집념이 느껴진다.


차는 진하고 맛있다. 계피향과 사과향이 서로 잘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내가 찾는 그 레몬차와는 영 거리가 멀다.

내가 찾는 티에 계피는 들어가지 않았나 보다.


요기티 클래식 차이 루스티

16 티백 1박스 7천 원선.


달콤한 계피, 카다몬, 매콤한 생강, 정향, 후추를 블렌드 했다.


주문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요기티 브랜드는 맛이 있다고 유명하다.

기대 중이다.


그러나 계피도 생강도 아니었던 것 같다.


요기티 중에는 초콜릿향의 티백이 있다.

맛이 궁금하다.

정말 맛있는 무설탕 초코 티백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곁에 둘 용의가 있다.


요기티 레몬진저

1박스 7천 원선. 16 티백.


생강 뿌리, 레몬그라스, 레몬 껍질, 감초 뿌리, 페퍼민트 잎, 흑후추.


역시나 레몬, 생강, 민트 계열의 스파이시 허브티 계열이다.


그러나 찾는 티는 생강이 아니었다.

이 티백도 내가 찾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번 마셔보기로 했다.



스태쉬 레몬 진저

20 티백 1박스. 6천 원선.

여전히 생강이 들어있지만, 어쩐지 눈에 익다.

뭐가 눈에 익숙한 걸까?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 비슷하다.

연노랑의 색감이 비슷하다.

명도도

채도도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다.


생강향은 역시나 아니다.


스태쉬 티백 중에서 레몬 계열을 싹 다 뒤졌다.

스태쉬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맞는 것 같은데.

맞는데.

흠."



스태쉬 허브티 마이어 레몬


20 티백 1박스. 만원선.


레몬그라스, 로즈힙, 히비스커스, 오렌지 껍질을 조합해서 레몬의 향과 산미를 만든 차


밝고, 과즙감 있고, 상쾌한 맛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레몬그라스, 로즈힙, 오렌지 껍질, 히비스커스, 구연산, 레몬 추출물, 홍화.


스태쉬는 캐나다 제품이다.

제품 설명을 읽어보니 내가 찾는 제품은 분명 이 회사의 제품이다.


"찾았다."

이쯤 되면 확신이다.

그런데 왜 내가 마신 바로 그 차는 없을까?



놀랍게도 스태쉬 공식 홈페이지에 단종된 레몬 블렌드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판매되는 마이어 레몬의 구매 후기를 읽었다.


한 소비자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2000년부터 스태쉬 차를 마셨는데, 과거의 오리지널 레몬 블라섬이 너무 그립다는 글이다.

현재의 마이어 레몬도 좋지만 예전 레몬 블라섬은 레몬 향이 더 선명했고,

마이어 레몬은 상대적으로 부드럽다고 써 놓았다.


심지어 그 제품을 다시 출시할 계획이 없느냐고 묻고 있다.

"나도 나도"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스태쉬 공식 안내에서 단종된 레몬 블라섬을 다시 찾아보았다.


세상에.

이미지가 있다.


"맞다!!!"

브라보, 브라보.

이럴 수가.

완전히 잊고 있던 레몬티를 드디어 찾았다.


바로 그 봉투다.

그림도 없고,

기억에 남을 뭔가 다른 것도 없다.


제품명이 기억에 안 남을 만하다.

티백 봉투에 적힌 글자가 너무 많다.



나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기억한다. 서랍 속에 들어있는 잡동사니를 사진 찍듯이.
그러니 당연히 기억이 안 남을 수밖에.


"스태쉬

프리미엄

레몬

블라섬

카페인 프리

허벌 티"


그러나 기쁨도 잠시.

20년 만에 겨우 찾았는데
이미 단종되었다.


이런, 마실 수가 없다.


허브차 업계의 노련한 탐정 노릇을 성공했는데

전리품이 없다.


스태쉬 홈페이지에 글을 써야겠다.

다시 생산해 달라고.


정말 황홀한 레몬 브렌딩 차였었다.

스태쉬의 다른 차는 마셔본 적이 없다.

주문해서 하나씩 마셔보자.

당분간 아주 행복해졌다가 바로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다른 차를 처음 맛보는 즐거움과
찾던 바로 그 차를 마실 수 없다는 절망감.


레몬블랜딩 티백을 쫒는 모험

이제 그 모험은 끝났다.


나는 티백에 연하게 그려진 나침반 모양을

마치 처음처럼 발견했다.


"이런 게 그려져 있었네.

처음부터."


내 귓가에

100여 개의 티백들이 속삭인다.


"슬퍼하지 마.
그건 실제로 있었던 모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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