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도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 부산 해운대에 있었다. 그냥 훌쩍 떠난 여행이었다.
한 열흘 있었나.
가까운 산에 마고할망의 사당이 있다고 해서 산을 올랐다.
음습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상한 곳이었다.
돌계단에서 돌멩이가 움직였다.
"몸이 안 좋나? 어지러운 건가?"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팔에 소름이 좌르르 돌았다.
얼룩덜룩한 돌멩이는 실은 돌이 아니라 가을에 독기운이 오른 독사였다.
결국 마고 할망은 만나지 못하고 내려왔다.
다음을 기약했다.
그다음은 지금 시즌이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절 근처에서 피안화를 만났다. 당시에는 꽃 이름은 몰랐다. 붉은색의 수술이 길게 뻗은 이상한 꽃이었다.
검은 나비가 서 있듯이 멈춰 있었다.
"날갯짓을 하는데 어떻게 멈춰있지?"
생각이라도 있다는 듯이 호랑나비만큼이나 화려한 검은 나비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일행이 없었다면,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벽에 풍경을 만들고 싶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경쾌한 금속 봉들이 달그락거리는.
그러다 자개로 꽃 장식이 된 귀걸이를 풍경이나 모빌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 꽃무늬가 피안화였다.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은 없다. 글을 쓰다 알았다.
오후에 데자뷔를 느꼈다. 글을 쓰고 있었다.
언젠가 아주 오랜 옛날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같은 분위기 같은 순간이군."
꿈을 꾸었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안 난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간밤의 꿈으로 어지럽다.
꿈속에서 나는 유혹당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에게.
아니, 유혹이 아니다. 조금 다른 느낌이다.
2호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엄마, 난 50까지만 살 거야."
"그래? 내가 낳은 게 확실하군."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나는 30까지만 살겠다고 마음먹고 10대와 20대를 버텼다.
막상 30이 되었을 때, 그만 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굳이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있어?"
"밖에 막 돌아다니면서 놀지 못하잖아."
"아니, 도대체 중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50이 되어서도 신나게 놀면 되는 거지."
"그러기엔 기력이 딸릴 것 같아. 재미있는 것도 없고."
"그래?"
"응. 그래서 50까지만 살 거야. 신나게."
오늘 갑자기
피안화가 자기의 이름을 내게 알려줬다.
마고할망 사당으로 올라가던 길에서 본 피안화와 검은 나비가 떠올랐다.
그랬었다. 잊고 있었다.
생김새도 이름도 이상한 꽃이다. 독사와 검은 나비도.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나비처럼 검은 그림자.
보이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뒤숭숭한 꿈자리는 살아보라는 유혹이었던가.
나는 알지도 못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피안화는 어떤 꽃일까?
피안화는 이름보다 생태가 더 기묘하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별과 죽음, 그리움과 윤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피안화는 '꽃무릇' 혹은 '석산'이라고 부른다.
가늘고 긴 꽃잎이 뒤로 젖혀지고, 수술이 꽃 밖으로 길게 뻗어 나와있다. 붉은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생겼다. 구근식물이다. 가을에 꽃대가 먼저 올라와 꽃을 피우고, 꽃이 진 다음 잎이 자란다. 잎은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까지 광합성을 하다가 여름에 사라진다.
그러니 꽃과 잎은 같은 식물에 속하면서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셈이다.
이 독특한 생태가 피안화에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피안은 저쪽 언덕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번뇌와 집착의 세계를 차안(此岸), 즉 이쪽 언덕이라고 부른다면, 피안은 그 번뇌를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킨다.
차안(此岸)은 이쪽 언덕, 번뇌와 집착의 세계.
피안(彼岸)은 저쪽 언덕,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
도피안(到彼岸)은 저쪽 언덕에 도달함.
바라밀(波羅蜜)은 깨달음의 완성을 향한 수행.
피안은 본래 죽은 사람들이 사는 장소를 뜻하지 않는다. 불교적 의미에서는 생사의 고통과 집착을 넘어선 경지를 가리킨다. 일본 민간문화에서 피안이 조상을 추모하는 의례와 결합하면서 죽음과 저승의 이미지까지 갖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춘분과 추분을 중심으로 조상을 기리는 오히간(お彼岸)이라는 풍습이 있다. 꽃무릇은 가을 오히간 무렵에 피어난다. 그래서 이름이 히간바나(彼岸花), 즉 피안화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꽃을 묘지나 논두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구근에는 독성 알칼로이드가 있어서 함부로 먹으면 위험하다. 과거에는 이런 성질을 이용해 논밭 주변에 심어 동물의 접근을 줄이기도 했다고 한다. 묘지 주변에도 심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죽음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우리나라 절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꽃이다.
왜 그런 곳에 피는지 알 수 없다.
일본에서 피안화에 흔히 연결되는 꽃말은 슬픈 추억, 체념, 재회, 독립, 정열이다.
꽃말은 지역과 자료에 따라 다르다.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꽃과 잎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꽃이 피면 잎이 없고, 잎이 돋으면 꽃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안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영원한 이별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피안화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만주사화(曼珠沙華, まんじゅしゃげ).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천상의 꽃인 만주사화에서 유래했다. 상서로운 꽃으로 묘사되지만, 일본에서는 그 이름을 현실의 붉은 꽃무릇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불교 경전에서 천상의 꽃과 연결된 이름을 가진 식물이, 민간문화에서는 죽음과 이별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역설이 있다.
같은 꽃에 상서로움과 불길함,
깨달음과 상실이라는 상반된 의미가 공존하는 셈이다.
피안화는 비극적인 사랑의 꽃으로 이야기되지만, 나는 그보다 식물 자체의 시간성이 흥미롭다. 잎이 사라진 자리에 꽃이 나타나고, 꽃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잎이 나타난다. 둘은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다. 잎이 광합성으로 축적한 에너지가 다음 꽃을 피운다. 꽃과 잎은 서로를 볼 수 없어도 하나가 다른 하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부재는 반드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안화는 그것을 구현하고 있다.
피안은 원래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집착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다.
그렇다면 피안화의 가장 깊은 상징은 누군가를 영원히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그리움마저 건너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꽃은 잎을 기다리지 않는다.
잎도 꽃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둘은 같은 생을 완성한다.
데자뷔와 어지러운 꿈자리로
피안화를 생각했다.
마고할망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핀 피안화 그리고 현재의 자개 꽃무늬.
나는 맑은 금속성이 울리는
풍경을 만들 생각이다.
영원히 불변할 것만 같은 만개한 피안화들을 엮어서.
자개로 만든 꽃잎이 흔들린다.
예술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내면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해서 글을 쓰는 중이다.
내 글은 마음속의 모빌 하나를 꺼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