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두들겨 맞은 것 같다. 커튼을 바꿨다.
커튼을 바꿨다.
비용 0.
아, 밤새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눈을 떠보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백만 년 만에 주문한 캡슐로 커피를 내린다. 투샷이다. 사치다. 좋다. 굿.
질 좋은 직물로 저렴하게 커튼을 맞추는 방법
1. 이케아 커튼 중 면 소재 구입
2. 이케아 반품코너에서
3. 이케아 식탁보 중 리넨 소재 구입
4. 이케아 반품코너만 간다
5. 이케아 플랫시트 중 고밀도 면 소재 구입
6. 이케아 반품코너를 뒤져보자. 언제까지? 원하는 녀석이 나올 때까지. 만나면 정말 반갑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 반가워.
넌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소중하게 다뤄줄게. 살살."
이케아 애정한다.
저렴하다.
아주 질 좋고 비싼 아이들이 섞여 있다. 유명 디자이너의 카피라고 하면 안 되려나.
가끔 그 아이들을 대폭 할인한다.
할인율
시즌 할인 < 몇 개 남은 제품 할인 < 반품 코너
식탁보와 플랫시트는 커튼으로 하기에 적절한 사이즈들이 있다.
커튼보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하다.
직물은 무엇보다 소재가 최고다.
워시드 리넨 화이트 애정한다. 고밀도 코튼도.
커튼을 바꿨다.
십 년 만이다. 집안 살림에 신경을 안 쓰고 살았더니 다 이런 지경이다.
안방 커튼은 20년도 넘었다. 지겹다.
10년 전인가 거실 커튼은 이케아에서 정말 큰맘 먹고 샀다.
면 소재 중에서 가장 저렴한 아이였다.
반투명하고 가로 70cm짜리 네 개다. 두 개씩 박음질을 할까 하다가 그냥 걸었다.
이것도 지겹긴 마찬가지다. 커튼이라기보다는 가리개에 가까웠다. 너무 얇아서 흐느적 거린다.
가장 큰 일반쓰레기용 봉투 75l짜리를 사 왔다.
1호의 방을 정리했었다. 내 몸살의 원인이다. 10 봉지는 넘게 버렸다.
집이 가벼워졌다.
육아에서 물건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나이가 있다. 그 시기를 나는 모른다. 1호가 정할 때까지 기다린다. 사용하지 않는 때에도 오랫동안 물건들은 갖고 있으려고 한다. 크레파스와 플라스틱 색연필, 수많은 보드게임, 바둑판, 실로폰, 여러 가지 공예품과 어릴 적의 작품들, 수많은 캔버스와 자잘하게 떨어지는 반짝이들, 자그마한 도예품과 마카펜 그리고 물감들, 봉제인형... 마음 같아서는 1호가 없을 때 몰래몰래 버리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그렇게 아이의 베란다에 쌓였던 수많은 물품들 앞에서 드디어 1호가 말했다.
"엄마, 이거 다 버릴래."
나는 표정을 관리한다.
"아, 그래? 이제 정리하려고?"
"응 필요 없어.
엄마, 도와줘."
"그래, 그러자."
맘이 바뀌기 전에 잽싸게 쓰레기봉투를 사 왔다.
그러던 차에 커튼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 버리자!"
일반쓰레기봉투에 커튼을 구겨 넣었다. 변색되고 낡은 커튼이다. 20년을 썼으니 충분하고도 남는다.
거실용 커튼을 안방과 1호 방에 나눠서 달았었다.
정말 저렴하게 득템 한 아이다. 쿠팡에서 창고할인 때 샀었나. 소재는 폴리에스테르 그리고 망사. 망사에는 엄지손톱만 한 작은 리본들이 수백 개 붙어있다. 그 덕에 폴리 소재는 눈에 띄지 않는 녀석이다. 영리하다. 디자인으로 소재를 가려버리다니. 다림질도 필요 없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기다렸다가 확 잡은 커튼이다.
무엇인가를 고를 때 나는 상당히 까다롭다. 그리고 오래 기다린다.
그런 면에서 나는 훌륭한 사냥꾼이다.
아주 오래 잠복했다가 잡는다.
원샷 원킬!
대개 그렇다.
충분히 오래 썼으니 보내주기로 했다. 아니, 지겹다. 바꿔보자.
커튼을 사려니 1호 방에 햇살이 심하게 들어온다.
할 수 없이 거실 커튼을 떼어 세탁하고 달아줬다. 웬걸. 흐늘거리고 반투명한 가리개 같던 면직물이 1호의 방을 화사하게 만들었다. 망사 가득하던 웨딩드레스 같은 커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1호야, 커튼 맘에 들어?"
"어. 좋아."
"아, 그래? 그걸로 그냥 쓸래?"
"응."
거실에 남은 두 폭의 커튼을 세탁했다. 특별히 베이비파우더향의 아껴둔 섬유유연제를 허락하기로 한다.
안방 커튼을 떼어내고 달았다.
와우, 완전히 다른 방이다. 흐늘거리는 가제수건 같은 면이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 좋다. 이렇게 좋을 데가.
거실에 달려있을 때는 좋은 줄 몰랐다. 네 폭의 가리개라니 사이즈도 두께도 커튼이라고 달려있으면 된다 정도였다. 포근포근한 아이보리 톤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분위기가 아니다.
몇 걸음 옮겼는데 같은 커튼이 하녀에서 여황후로 변신했다.
1호의 방과 안방에서 나온 커튼을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어 테이핑 한 채로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란다에 덩그러니 놓아둔 봉투를 보다가
커튼을 사려고 여기저기 찾아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다.
너무 비싸거나 소재가 별로거나 할인 시즌이 아니다.
젠장. 아주 오래 잠복해서 득템 했던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수많은 밤을 나는 고민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에 분석하고 필요한 것과 버릴 조건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선택한다. 결정 이후 그 모든 것들은 다 분쇄기에 넣어서 갈아버린다. 굳이 수많은 복잡한 것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늘 결정 이후에는 '휴지통 비우기' 버튼을 클릭한다. 미션 클리어.
20년이 지났는데 이전보다 나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예전 결정의 기억은 무의식에나 남아있을 뿐이니 기억날 리가 없다. 몸으로 감각하는 건가.
도매시장에 가서 리넨 원단을 사다가 커튼으로 달아볼까 하다가 거기서 멈췄다.
나는 잽싸게 커터칼을 들고 베란다를 나갔다. 쓰레기봉투의 마스킹 테이프 끝을 툭 하고 칼날로 건드렸다. 아주 쉽게 테이프는 갈라졌다. 수북이 먼지 쌓인 듯한 변색된 커튼을 다 꺼냈다. 어차피 버리는 것 커튼 핀은 그대로 달려 있다. 거실에 앉아 핀을 하나하나 빼냈다. 제대로 빠지지도 않는다. 부식된 금속 핀은 섬유와 일체가 되었다.
금속을 모두 제거한 커튼은 5단계의 세탁 과정을 거친다.
아이의 방에 달려 있던 커튼은 뭔지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물질들이 묻어 있다.
확인하고 나서 다시 알칼리성 세제로 부분세탁. 그리고 방치. 얼룩제거제와 손빨래
알칼리성 세제와 워싱소다로 각각 애벌빨래,
그리고 중성세제로 세탁을 한다.
색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면 과탄산 같은 표백제로 다시 세탁한다.
하얗게 만들어주는 세탁비누도 중간중간 사용한다.
세제·워싱소다·과탄산 등을 연속으로 쓸 때는 각 단계 사이 충분히 헹궈야 한다. 그래서 5단계는 각각의 세탁 과정(세탁 헹굼 탈수)을 모두 다 진행한다. 세제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 안된다. 순서도 양도 모두 다 중요하다. 잘못하면 직물이 손상되거나 잔류 세제가 다른 세제의 효과를 억제한다.
애지중지하던 베이비파우더 향의 섬유 유연제를 듬뿍 넣어준다. VVIP용이다.
그렇게 커튼은 초럭셔리 리햅을 졸업했다.
20년 됐으니 요양원이라 해도 이상하진 않다.
뽀샤시한 원래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피닉스다. 불사조. 20년이 넘었지만 절대 죽지 않는다.
"그래, 넌 영원히 나와 함께 하자."
그렇게 나는
베이비파우더 향이 나는 '다우니 엑스퍼트 센서티브 섬유유연제' 아래에서
피의 맹세를 했다. 나도 이럴 줄 몰랐다.
어쩐지 운명 같았다.
다른 게 아니라 베이비파우더 향 말이다.
나의 무의식은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될 줄.
그리고 그렇게 방에서 죽어가던 커튼들은 제 짝을 만나 부활하고 다시 거실에 달렸다.
결혼식 축제 같은 분위기다. 수백 개의 망사 리본. 흠. 좋다.
커튼을 바꿨다.
비용 0.
아, 밤새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분칠한 신부 마냥 집이 뽀얗게 변했다.
나는 상으로 내게 에스프레소를 허하기로 했다.
어젯밤 도착한 커피리브레의 다크 리브레 캡슐. 하아. 이렇게 다크하다니. 행복하다. 찐!! 인정!!
커튼에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이 아름답다.
우울은 조금 변했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