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상태와 상대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번역하는 과정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소통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업무상의 능력이 관계에서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일상의 불편함을 언어로 정확하게 상대에게 말한다고 해서
자기감정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말로 잘 표현한다고 해서
자신의 정확한 감정을 잘 느끼는 것도 아니다.
표층 감정은 정확하게 언어화하지만
그 아래의 구조까지 내려가는 능력은 그것만큼 발달하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사소하고 세세한 것들은 잘 감각하고 표현하더라도
실제 그것들이 어떤 깊은 감정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건 부담스럽다.”
“이건 싫다.”
“이건 불편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싫다.”
“나는 지금 혼자 있고 싶다.”
이런 이야기들은 잘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구조를 이해하는 수준에서는 깊이가 떨어질 수 있다.
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무척이나 크다.
“왜 나는 관계가 깊어질수록 부담을 느끼는가.”
“왜 상대의 요구가 나를 통제처럼 느끼게 하는가.”
“왜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설명을 피하는가.”
“왜 나는 친밀감을 원하면서 동시에 물러나는가.”
“내가 불편한 게 상대 때문인지, 내가 감당 못하는 내 내부 때문인지.”
굳이 능력적 부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생각도 빠르고, 말도 빠를 수 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어떤 사람이 별로인지, 어떤 상황이 웃기는지, 어떤 원칙이 중요한지 설명하는 건 능숙할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내적 층위를 깊이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시간이 지체될 수 있다. 큰 의미, 결론, 해석에는 강한데, “내 감정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됐고, 그 밑에 어떤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이 지금의 행동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아주 세밀하게 분해하는 건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감정을 언어로 분석하는 방식과 느낌과 이미지 그 자체로 두는 방식 등 그것을 다루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인지 말로 정확히 알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직감과 감각적으로 느끼는 상태로 두는 사람도 있다.
자기 관찰과 자기 침투는 다른 능력이다.
자기감정을 밖에서 잘 볼 수는 있어도, 안으로 깊게 잠수하지는 않을 수 있다.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서 일부러 안보는 경우도 있다.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고, 사람마다 다르다. 분석하고 구조화할 수도 있고, 특정 감정을 느끼는 상황 자체를 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무의식적으로만 알 수도 있다.
자기감정을 설명할 때도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난 원래 이런 거 싫어해.”
“난 구속받는 거 싫어.”
“난 복잡한 거 싫어.”
“난 감정소모 싫어.”
이런 문장들은 명료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사실 아직 얕은 층이다.
왜 구속으로 느끼는지,
왜 설명 요구가 감정소모로 느껴지는지,
왜 상대가 가까워질수록 피곤해지는지,
왜 자기 자유가 그렇게 쉽게 위협받는다고 느끼는지.
이건 더 아래층의 이야기다.
그것은 자신이 인식의 상태까지 끌어올려서 알 수도 있고, 모르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을 수도 있다.
자기감정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자기 욕망의 근본 원인을 의식이 다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자주 멈추는 지점은,
어쩌면 앞으로 더 깊어질 수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과 그것들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 내면의 깊은 이유들을 알게 되면
타인의 언어적 표현과
그 내면의 깊은 이유들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관계에서 유연성을 갖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족
추석이다.
친척들은 꼭 편안한 말만 하지는 않는다.
어떤 질문은 간섭처럼 들리고,
어떤 자랑은 피곤하게 들린다.
그래도 그 말 아래에는
“그동안 잘 지냈냐.”
“나도 잘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같은 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말은 언제나 마음의 정확한 번역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