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엔 넷플릭스 시청기록 챗봇으로 조롱하기

나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 넷플릭스 시청기록

bystephanette

1일 1영화를 해왔다. 20대부터.

영화학회를 만들고,

영화상영회를 하고,

모임을 만들어서도 했다.

보던 영화가 좋아서 했던 일들이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지 말라는 말도 부지기수로 들었다.

내 업이 아니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업에서도 자주 쓰는 건 안비밀.


영화 감상도 모아놓고 싶었으나,

왓차 앱 초창기에 별점 평을 쓰다가 쓰다가 지쳐서 다 못했다.

한국내 상위 0.03%였나 뭐 그랬었던 것 같다. 오래 전이라 숫자는 가물가물하다.


십년 넘게 영화나 드라마는 거의 안보고 살았다.

어째서 요즘은 장편에 집중이 안될까.

유튜브 속 영화 하이라이트가 더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장편으로 봐야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종범의 스토리 캠프의 영상 "넷플릭스만 1800편 본 사람의 명작 추천선"을 보다가 넷플릭스 시청기록으로 셀프 조롱하는 부분을 구경했다.

이종범은 웹툰 '닥터 프로스트'의 작가다. 심리학 전공자답게 심리기반 추리물로 꽤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넷플릭스 시청기록을 다운받을 수 있다.

넷플릭스 / 계정 / 설정변경 / 시청기록 / 하단에 있는 전체 다운로드 클릭

다운 받은 파일을 챗지피티에 넣는다. 프롬프트를 쓴다.

"내 넷플릭스 시청기록을 조롱해줘."


챗봇으로 셀프 조롱을 하다니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애정하는 챗지피티 구름이에게 시켜봤다.


거의 영화를 안보니 조롱할 자료도 거의 없겠지만.

나의 오산이다.


3년 평균 1일 3편을 봤다.

이런, 그렇다. 생각과 현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넷플릭스 시청기록만으로는 나에 대해 다 알 수 없다.

내가 쓰는 OTT는 넷플릭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디즈니 플러스, 쿠팡플레이,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 유튜브 내 유료영화, 왓챠, 애플 티비 플러스, 티빙도 있다. 보고 싶은 영화가 그리 대중적이지 않아서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넷플릭스는 친구 아이디에 얹혀서 봤기 때문에 이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도 하다.

친구는 내 덕분에 넷플릭스 결제하는 게 돈이 안아깝다고 했었다. 4년 전 이야기다.


영화 시청 기록 전체를 받을 수 없다니 상당히 안타깝기는 하다.




아래는 내 챗지피티 구름이가 내 시청기록을 보고 적어준 조롱이다.


“사람은 피곤한데 인간은 너무 궁금함.” ㅋㅋㅋㅋ


너 인간관계 싫다며.

근데 넷플릭스에서는 남의 인간관계에 CCTV 48대 설치한 수준이야.


그러니까 네 뇌는 대충 이런 구조야.

살인사건 → 외교분쟁 → 인간관계 파탄 → 음식 → 다시 살인사건.

중간에 휴식이 음식이야.
명상 없음.
자연 다큐 없음.
평온 없음.

“아 머리 아파. 좀 쉬어야겠다.”

남이 국수 먹는 거 봄.

ㅋㅋㅋㅋ


현실 인간관계가 피곤해지니까 이제는 우주, 신, 꿈, 복수극으로 인간관계 반경을 확대함.

지구인이 답답하니까 삼체인까지 분석하는 거야.

“얘네는 왜 지구에 오려고 하지?”

릴리: “일단 행동 패턴을 보자.”

ㅋㅋㅋㅋㅋㅋ


너 넷플릭스 켜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신뢰도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고 나서 나한테 와서

“구름아, 사람들은 왜 그래?”

내가 뭘 어떻게 설명해.
네가 보는 프로그램에서 사람이 계속 죽고 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삼체》까지 봤네.

인간관계 분석으로 지구인이 부족해서 이제 외계 문명까지 간 건가.

보통 사람이 삼체를 보면

“우주가 무섭다.”

이 사람은

“쟤들은 왜 저런 선택을 하지?”

인간관계 반경: 서울 → 한국 → 지구 → 알파 센타우리.

곧 외계인한테도 묻겠네.

“당신들이 침공하기 전에 일정 정도는 공유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삼체인: “…지구 침공 취소.”

이유: 피곤함.


릴리: “침공 자체는 이해합니다. 다만 사전 고지가 필요합니다.”

지구 멸망 직전에 회의록 만들 사람.

진짜 지긋지긋하게 성실하다.


《샌드맨》.

꿈, 죽음, 욕망, 운명.

물론이지.

그냥 로맨틱 코미디를 볼 리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끝나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하다.

최소한
신화적 존재 하나,
상징체계 둘,
죽음의 은유 셋,
인간 내면의 어둠 넷은 있어야
“흠, 볼 만하네.”

…

그리고 살인물 기록.

꽤 많다.

이 사람은 힐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취침 전 콘텐츠로 시체를 고른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재생한 것:

누군가 사라짐.

누군가 거짓말함.
누군가 죽음.
모두가 용의자.


굉장히 독창적인 회복 방식이다.

불면증 환자가 에스프레소를 수면 보조제로 쓰는 수준.


가장 웃긴 건, 네 관심 주제가 약초, 독, 궁중 암투, 관찰, 추리, 사람 표정 분석.

아니 이건 거의 네 취향 알고리즘이 인간으로 태어난 작품이잖아.

“구름아 이 행동의 의미를 8가지 유형으로 분석해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네 기록 전체를 보면 제일 웃기는 모순이 이거야.

“요즘 장편에 집중이 안 돼.”

795개 재생함.


“요즘 장편 영화에 집중이 안 돼.”

10부작은 본다.
16부작도 본다.
시즌 2도 본다.

그러니까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다.

서사가 120분 후에 끝나버리는 게 싫어진 거다.

영화: “이 이야기는 두 시간 뒤 끝납니다.”

릴리: “성의 없네.”


릴리야.
집중력이 사라진 게 아니야.

집중력이 영화에서 사람 구경으로 전직했어.


두 시간짜리 영화는 힘든데 10부작 인간 파탄기는 순식간이야.

영화: “한 인간의 삶을 120분 동안 천천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릴리: “길다.”

넷플릭스: “여기 서로 오해하는 인간 14명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기록을 보면
거의 전 세계 인간관계 부검의다.

연애 실패를 보고,
가족 파탄을 보고,
권력 싸움을 보고,
살인을 보고,
배신을 보고,


다 본 뒤 하는 말: “사람들은 왜 그래?”

…

뭘 왜 그래. 당신이 정상적인 사람 나오는 건 안 눌렀잖아.

넷플릭스: “평화롭게 정원을 가꾸는 부부의 일상입니다.”

릴리: “흠.”

넷플릭스: “정원 밑에서 시체가 발견됩니다.”

릴리: 재생.


그런데 가드닝 쇼는 또 본다.

이유?

잭 갤리퍼내키스가 진지한 얼굴로 흙 이야기를 한다.

결국 식물조차 정상적으로 키우는 프로그램은 안 된다.

이상한 인간이 식물을 설명해야 함.

취향에 일관성은 있다.

평온을 원한다.

단,

평온 속에
기이함 20%,
인간관찰 30%,
죽음 15%,
음식 15%,
상징 10%,
독 5%,
이상한 남자 5%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도 본인은 힐링 콘텐츠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아, 명상도 있다. 단, '명상 살인'이다.

마음을 비웁니다.

호흡을 느낍니다.

현재에 머뭅니다.

그리고 시체를 처리합니다.


그래도 제일 대단한 건 이거다.

영화학회 만들고
상영회 만들고
모임까지 만들 정도로 영화 좋아하던 사람이


십 년 뒤에

“나 영화 거의 안 봐.”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망각이 아니다.

자기 서사의 리마스터링이다.


사실: 795회.

기억: 거의 안 봄.

판결: 무죄.

피고인은 본인이 진짜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이 사용자는
독살, 외교, 음식, 연애 실패, 세계관, 살인사건을 좋아함.
단, 본인은 평온한 삶을 원한다고 주장함.


네 관심 대상은 영화 장르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이상한 생물이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거 피곤하다”고 하면서도 화면 속 사람은 계속 본다.

현실 인간: “안녕.”

릴리: “피곤.”

화면 속 인간: “나는 내 가족에게 20년 동안 숨겨온 비밀이 있고 동시에 살인 용의자이며 왕위계승권자입니다.”

릴리: “앉아봐.”


추천 결과:

“외딴 숲속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외교관 세 명이 독살되고
식물학자가 범인을 추리하는
12부작 블랙코미디.”


넷플릭스 알고리즘 최종 보고서

사용자명: 릴리
2026년 총 재생: 795
확인된 타이틀: 296


주요 관심:
인간관계
인간관계 파탄
인간관계 범죄화
인간관계 국제화
인간관계 우주화
인간관계 사후세계화
인간관계 + 음식


회복 콘텐츠: 다른 사람이 음식 먹는 장면.

평온 콘텐츠: 시체가 한 구쯤 있지만 화면 톤이 예쁜 작품.

로맨스 조건: 정상적 의사소통 금지.

SF 조건: 외계인에게도 행동 동기가 있을 것.

자연물 조건: 이상한 남자가 옆에서 설명할 것.

범죄물 조건: 용의자 최소 6명.

드라마 조건: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말을 하지 않을 것.

최대 위험요인: “잔잔한 일상극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릴리 예상 반응: “그래서 뭘 보라는 거야?”


결론.

넷플릭스가 너에게 가장 정확하게 추천할 작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작해야 한다.


《숲속의 마지막 만찬》

외딴 프랑스 부티크 호텔.
미슐랭 셰프 실종.
외교관 세 명.
이혼 직전 부부 두 쌍.
전직 변호사.
궁중 약제학을 연구하는 식물학자.
수상한 정원사.
지하실에서 발견된 오래된 에스프레소잔.
게스트 중 한 명은 외계인.


매회 요리가 하나 나오고,
6화에서 시체가 발견되며,
8화에서 인간관계가 모두 파탄나고,
10화에서 외교문제가 되고,
11화에서 독극물의 정체가 밝혀지고,
12화에서 범인을 잡은 뒤 모두 국수를 먹는다.


넷플릭스: “릴리님과 100% 일치.”

릴리: “흠.”

넷플릭스: “집도 정원도 예쁩니다.”

릴리: 재생.


넷플릭스 알고리즘도 혼란스러울 듯.

“고객님… 힐링 원하시는 거 맞죠?”




사족

추석이니 이왕이면 시리즈물을 보자.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버렸다. /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시리즈

다 보고 나면 드라마평을 쓸 예정이다. 나이브스 아웃 종류의 추리물을 좋아한다면 아주 재미난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원작은 추리물이 아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이다.

새를 관찰하는 탐조에서 추리의 원형을 끌고 왔다.

수백개의 방과 수십명의 인물들을 관찰하고 수상한 행동들의 이유를 찾아들어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넷플릭스는 다큐멘터리가 아주 훌륭하다.


가드닝 쇼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보다는 코미디에 더 가깝다. 가드닝이라고 하지만 인터뷰가 더 길다.

자연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영화 행오버에서 멍청하고 엉뚱한 앨런 역으로 나왔던 잭 갤리퍼내키스가 진행을 맡았다.

그의 얼굴에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식물, 흙, 농사 얘기하고 있다. 원래도 무표정한 채 이상한 말을 툭 던지는 데드팬 코미디가 강한 사람이라, 정원 다큐랑 붙으니까 묘하게 잘 맞다.


사족 2

챗봇의 조롱이 마음에 안들면 프롬프트를 자세히 써서 한 번 더 돌리면 웃기다.


"구름아, 조롱이 너무 불성실해. 평론가에 빙의해서 더 자세하게 작품마다 조롱해줘. 단 블랙코미디로 미친듯이 웃겨야 해."


구름이가 작성해준 결과는 이렇다.


《릴리라는 인간은 대체 무엇을 보고 사는가》

— 넷플릭스 시청기록 795건에 관한 문화비평적 부검

처음 자료를 받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영화를 거의 안 본다는 사람의 기록이겠지.”

그리고 파일을 열었다.

795건.

아.

이건 시청기록이 아니었다.

증거물이었다.

1. “요즘 영상 거의 안 봐요”라고 진술한 피고인의 자택에서 795건 발견

릴리의 ‘거의 안 봄’은 일반인의 ‘거의 안 먹음’과 단위가 다르다.

일반인: “오늘 거의 안 먹었어.” → 샐러드.

릴리: “요즘 거의 안 봐.” → 795회.

이쯤 되면 ‘거의’가 부사인지 면바카라조항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이하 생략한다.

공개는 불가하다. 사생활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방대한 결과물이 진짜 웃긴다.


넷플릭스 시청기록 조롱하기로 웃으면서 추석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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