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짇고리를 샀다. 잃어버린 은색 틴케이스의 반짇고리
반짇고리 애정한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로만 모아놓은 것이다.
시바스 리갈이었나
난 시바스 리갈은 마시지 않는다. 아마도 조니워커 골드라거나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
한정판으로 은색 틴 케이스에 담겨 나온 적이 있다.
화려한 황실의 양각 무늬 같은 것들이 박스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 내 반짇고리로 낙점되었다.
주로 짙은 네이비색의 쿠키 틴케이스가 반짇고리에는 어울린다.
그러나 나는 화려한 아이가 좋다.
뚜껑을 열면
연한 분홍색의 반투명한 리본,
질 좋은 명주로 만든 프랑스 자수실,
갖가지 한복천으로 알록달록 천을 이어서 만든 골무들과
금으로 도금된 귀를 가진 수많은 바늘,
작은 쪽가위와 핑킹가위, 재봉용 가위,
진주로 장식된 시침핀과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핑크색 초크.
선물을 받을 때마다 모아놓은 장식 리본들.
짙은 네이비에 하얀 스티치로 장식된 얇은 리본부터 브랜드가 양각으로 인쇄된 리본까지.
내가 정말 애정해 마지않는 반짇고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졌다.
그 안에 들어있던 수많은 물건들은 산산이 해체되어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다.
왜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갖고 놀려고 하는 걸까?
설마 십수 년이 넘게 바느질을 해왔던 거야?
이불 커버와 이불솜에 똑딱이 버튼을 달려고 했더니
내가 좋아하는 툴이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도구를 애정한다.
독립을 하면서 제일 먼저 구입했던 것이 전동드릴과 전선 피복 벗기는 기구다.
창고의 가운데 칸에 전동 드릴 박스가 세 개인가 네 개인가 좌르륵 줄을 지어 놓여 있다.
온갖 종류의 신기한 도구들을 하나씩 모으는 것을 애정한다.
집에는 블랙홀이 있다.
늘 아끼는 도구부터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반짇고리를 샀다.
오천 원이다.
뭔가 필요한 것들은 다 들어있다.
그러나 바느질이 안된다. 이런 실이라니. 마찰강도가 너무 크다.
버튼홀 스티치도 제대로 모양이 안 잡힌다.
약간 도톰하고 스르륵 바느질이 되는 실이 좋은데 방법이 없다.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똑딱이 버튼의 사방 네 군데의 구멍을 이불 고리에 바느질했다.
그러니까, 이불 커버 사방과 중간중간 그리고
이불솜의 똑같은 부분까지.
28개의 단추와 72개의 단추홀.
좋은 실을 사고 싶다.
하얀 광택이 좌르르 흐르는 둥그런 실패에 착착 착착 가지런히 감겨 있는 실.
바느질 모양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두툼한.
이불 똑딱이를 다 맞춰 이불솜을 끼우고, 너덜거리는 리본을 하나하나 다 묶는다.
끈매기 법으로 가운데 매듭의 각도를 정사각으로 맞춰서 단면리본의 앞면이 양쪽 대칭이 되도록.
단면 리본으로 양쪽 대칭 매듭을 만드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무척 애정한다.
꼬물꼬물 하고 있자니 시간은 잘도 간다.
2호의 방 침대 위에 이불을 구름처럼 소복하게 올려줬다. 이런 행복할 데가.
1호에게 물어봤다.
"이불솜 빠져서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응."
"그래? 똑딱이 달아줄게."
"아니."
사춘기인 1호는 정말 길게 말하는 중이다.
"잉? 줘봐. 달아줄게."
"아니야. 괜찮아."
뭐가 괜찮은지는 모른다. 1호가 그러겠다니 그냥 뒀다.
1호는 뭉친 이불속에서 악몽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나중에 똑딱이 단추를 달아달라고 애원해도 나는 꿈쩍도 않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냥 그날 달아달라고 하지. 안돼. 다 끝났어. 시마이. 종료!"
그러나 그럴 일은 없다.
1호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한 번 정하면 끝까지 간다. 단순하고 깔끔하다.
아이들의 샤워가운을 새로 샀다.
이만 원의 행복이다.
하얀 타월지의 샤워가운을 세탁하고 건조기에 말렸더니 두툼하게 한 올 한 올 살아났다.
그 대신 둘이 구분이 안된다.
그래, 자수를 하자.
청색으로 프랑스 자수 도안의 꽃무늬.
자수를 마치고도 마음이 내키면 다른 샤워가운에 빨간색으로 같은 자수를 할지도 모른다.
자수실도 없이,
얇고 마찰계수가 큰 어쭙잖은 실로
프랑스 자수라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가 알았다.
타월지에 자수를 놓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한 땀 한 땀 타월 파일 사이로 숨어든다.
청색은 어디로 간 거야?
온갖 바느질법을 다 써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 푸른 꽃은
하얀 들판 하얀 잡초 아래 숨고 싶은가 보다.
두툼하고 광택 나는 프랑스 자수의 이미지는
가냘픈 들꽃이 되어버렸다.
"에잇!"
빨간 꽃 자수는 포기다.
나의 잃어버린 명주 자수실은 지금쯤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엄마가 쓰던 실이다.
짙은 청색의 명주 한복천을 자수틀에 고정시키고 모란꽃 같은 것들을 수놓던.
어릴 때 외가의 엄마 방에서 봤던 꽃자수들.
하얀 패브릭에 프랑스 자수를 놓아서
샤워가운에 달아줘야겠다.
어떤 도안으로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은색 틴케이스의 반짇고리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