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기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요즘 정신분석가의 강연들을 듣고 있다.
낯선 곳에서
모르는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주 오랜 시간 라포가 잘 형성되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아주 조용하고 잔잔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가성비 있게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도 전혀 아니다.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작업이면서,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덮쳐오고 휘말리는 경험이다.
미국의 정신과 치료에서는 점차 증상의 감소와 행동의 변화처럼 비교적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결과를 중요하게 다루어왔다. 의료보험과 비용, 치료 기간의 문제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변화가 보이는 치료가 제도적으로도 유리했을 것이다. 인지행동치료가 강해진 것도 그런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증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관계를 반복하고,
비슷한 장면에서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다시 정신역동적 치료와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 전통에서는 분석가가 내담자의 무의식을 대신 설명해 주는 태도를 경계한다고 한다.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당신의 무의식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그 대신 내담자가 자신의 말을 계속 펼쳐낼 수 있도록 질문하고 기다린다.
내담자가 자신의 언어를 다시 듣게 되는 과정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가가 자신에게 하던 질문들을
언젠가 자기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바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잠시 멈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왜 나는 여기에서 멈추는가.
왜 이 말에서 불편해지는가.
왜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가.
답을 빨리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
어쩌면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런 능력을 조금씩 갖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