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마지노선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느 정도 고통받을지 마지노선을 스스로 인지한 채로 사랑을 시작한다.
“귀하를 사랑하겠습니다. 단, 정신적 손실률 17% 도달 시 자동 청산됩니다.”
사랑에 마지노선을 설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영토를 나눠갖는 일이다. 그 이전의 삶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어렵다. 자신의 주장만을 하거나 타인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모두 사랑과는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계산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적당한 선을 그어놓고 방어를 하기란 쉽다.
그 덕에 사랑은 망가진다.
비겁하다.
사랑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상처받을 수도 있고, 더 많이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모두 제거하고 사랑하겠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왕이면 용감한 사람이 좋다.
사랑은 애초에 상대가 내 세계에 들어오는 사건이라 어디가 얼마나 변하고 어떻게 아플지 예측하기 어렵다.
초기의 설렘과 열정의 단계를 지나가고 나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처음에 세워놓은 한계선 자체는 움직인다. 나는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끼기도 하고 자기가 처음의 거기보다 훨씬 더 멀리 와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랑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사랑은 취약성을 수반하고, 취약성에는 고통의 가능성이 따라온다.
사랑의 속성 자체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크기를 미리 측량하고 발을 깊이 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위험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사랑은 안전하지 않다.
“나는 너를 사랑하되 내가 불안해지지 않을 만큼만.”
“내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만.”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을 만큼만.”
“내가 너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만큼만.”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사랑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내가 손상되지 않는 일이 언제나 우선하도록 설계된 사랑.
그런 것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 사랑에서는 불가하다.
상대를 좋아하면서도
통제권은 놓지 않고,
취약성은 최소화하고,
계산해서 리스크를 관리하고,
상대가 먼저 오게 만들고,
자기 감정의 깊이는 끝까지 감춘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기 손상을 피하려고 하면 사랑 자체도 사라진다.
당연히 사랑은 자신을 드러나게 한다.
가장 밑바닥의 온갖 모습들. 자신도 처음 대면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
계속 흔들리게 한다. 일정한 생활과 자신 내면의 정돈된 상태가 모두 깨어진다.
자신의 정체성 자체도.
혼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소유욕과 통제욕.
기다리는 나.
겁먹는 나.
멍청한 나.
비참해지는 나.
슬퍼서 우는 나.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나.
심장이 쓰라린 나.
드러낸 취약함에 정확히 칼 맞고 괴로운 나.
이상할 정도로 용감한 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덜컹덜컹 흔들리는 나.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행동을 하는 나.
사랑은 무섭다.
타자를 알게 되는 사건인 동시에 내가 모르던 나를 알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한다면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내가 애정하는 사랑은 고원 위에서의 만남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 가져온 이미지다.
물론 고원 위에서도 바람은 분다.
그러나 미리 풍속 3m/s 이하인 날에만 사랑하겠다고 하면 그건 넣어두기로 하자.